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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지 Jan 14. 2024

병욱

# 1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 나오는 글귀 중에 ‘나의 운명이 곧 뭇사람들의 운명이다.’라는 말이 있거든.

왠지 난 이 말이 참 좋다.

내가 겪고 있는 힘듦이나 슬픔, 외로움 그리고 기쁨 같은 것들이 나만의 운명이 아닌 뭇사람들의 운명이라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것, 너와 나의 것’이라면. 그것만큼 큰 위안이 있을까. 또 그것 만큼 기쁜 게 어디 있을까.

함께라서 참 좋은 나날들이다.


2011-02-11 00:05, from. 병욱



# 2

  「밖에 눈이 많이 와. 더 많이 올 거래.

  지금 나가는 게 좋겠다.」


  「그럼 지금 나서자!」


 중앙도서관 4 열람실, 교육학 책 더미 앞에 앉아 있던 J는 몇 테이블 건너에 있는 병욱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병욱은 팔짱을 낀 채 현대문학사 책을 노려보듯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난데없는 폭설이었다. 눈 구경하는 학생들로 붐비는 도서관 입구를 빠져나오며 병욱은 물었다.

 “무슨 공부하고 있었어?”

 “난 오전엔 교육학이지. 아직 계획한 거 반도 못했는데. 집에 가서 보려고 꾸역꾸역 챙겼어.”

 “으이그, 낼 보면 되지. 그 무거운 걸 가져왔냐?”

 “내일은 또 내일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너처럼 그날 땡기는 거 공부하는 애가 뭘 알겠냐? 크흐흐.”

 학교 후문을 빠져나와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내리막의 끄트막에 자그마한 슈퍼가 나오고, 그 오른쪽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발끝에 힘을 주고 조심조심 걸었다. 가방이 무거워서인지 J는 자꾸만 뒤로 휘청했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작정하고 쌓여 보려는 듯 꽤 하얗게 땅을 뒤덮는 중이었다.

 “부산에는 이렇게 잘 안 오는데, 그치?”

 “그러게 말이야. 얼마나 더 오려나.”

 조심스러운 발끝과 점점 시려오는 손끝을 어찌할 줄 모르며 둘은 눈으로 도로 끝을 좇았다.

 “51번 온다!”

 우산을 접고 탈탈 털었다. 버스에 오른 둘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2인석에 앉았다. 77번 버스도 동래로 가지만 두 자리가 비는 경우가 잘 없기에 늘 보내고야 만다.

 “넌 오늘 누구 작품 봤어?”

 붉어진 두 뺨에 손을 갖다 대며 J가 물었다.

 “오늘은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라는 시를 만났지.”

 “못 들어 본 시다. 어떤 내용이었는데?”

 “남자가 어느 날 병에 걸렸대. 결핵이었던가 봐. 왜인지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어. 남자를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대뜸 찾아와선...“

 “고백했니?”

 ”나도 형과 같은 병에 걸리고 싶어요.“

 “왜 형이야? 남자였어?”

 J가 질문을 던지자 병욱은 웃기다는 듯 얼굴이 망그라졌다. 때마침 버스는 동래전화국에 도착했고, 둘은 당감동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 탈 요량으로 하차했다. 마침 내렸던 버스 뒤에 179번 버스가 따라오고 있어 금세 환승을 할 수 있었다. 그 찰나에 굵은 눈송이가 J의 앞머리와 병욱의 눈썹에 내려앉았다. 179번 버스에는 2인석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뒤따라 앉은 병욱은 J의 머리칼을 털어줄까 하다 손을 거둔 채 말했다.

 ”그땐 선후배 사이에도 형이라는 호칭을 썼으니까. 그런데 그날 이후로 남자의 새 약병이 비워지기 시작했다네.”

 “낫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거구나.“

 “응, 황지우는 ‘아, 그것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라고 표현했어.“

 “너무 로맨틱하다.”

 “그치? 둘은 오래 서로를 살았고, 최선을 다해 함께 늙어갔대.”

 “그래서 제목이 ‘늙어가는 아내에게’였구나. 아, 같은 병에 걸리고 싶다는 건 얼마나 큰 사랑일까.”

 둘에게만 흥미진진할 이야기가 무르익어갈 때, 기사 아저씨가 뭐라 뭐라 외치셨다. 들어본 즉, 눈이 너무 쌓여 오르막을 올라갈 수 없으니 여기쯤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목적지까지는 네 정거장 정도가 남았다. 혼자였다면 막막했겠으나 발걸음 맞출 발 동무, 심심하지 않게 수다 떨 입 동무가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릴없이 버스에서 내린 둘의 표정은 왠지 들떠 보였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선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들고 있던 우산을 펼치고 걸었으나 걷다 보니 눈 맞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도로 접어들었다. 눈송이가 머리칼과 패딩에 떨어질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가 났다.

 “여기서 육교 건너자. 너 데려다주고 난 돌아올게.”

 “그래. 계단 조심해!”

 J는 병욱의 발자국을 따라 계단을 사뿐 올랐다. 앞서 가던 병욱이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줍더니 차고 단단한 무언가를 J에게 날렸다.

 “앗, 뭐야! 너 지금 눈 던진 거야?”

 “계단 미끄러우니 정신 차리고 걸어 올라오라고. 하하!”

 “너 인제 죽었다.”

 누군가에겐 식상하고 유치한 눈싸움일 테지만 부산이라는 땅에서 22년을 나고 자란 J와 병욱에게 눈이란 너무도 귀하여 그럴 법도 한 장난질이었다. 고작 작은 육교 하나를 건너며 둘은 신나게 눈덩이를 주고받고 흩뿌렸다.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들고 있던 우산의 대는 휘어졌고, 머리칼은 흠뻑 젖어 반질반질 윤기가 나고 있었다.

 “덕분에 재밌게 집에 돌아왔네. 잘 들어가라.”

 “나도 스트레스 풀린 듯! 너 집에 들어가서 공부해야 한다? 안녕!”

 “내일 보자!”

 집으로 돌아가 뜨끈한 장판과 이불 사이에 몸을 뉘이면서 J는 병욱이 내일이면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는 전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병욱, 나 4 열람실 도착. 어디야?」


 「오늘도 안 왔어? 왜 연락이 없어?」


 「야, 무슨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이렇게 걱정하게 하면 어떡해. 문자 보면 바로 연락 줘.」


 「너무한다. 진짜...」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J의 연락에 병욱은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원래 없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병욱은 하얗게 사라졌다. 처음에는 궁금했다. 나중에는 걱정이 되어 초조했다. 더 나중에는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 씩씩거렸다. 혼자가 된 J는 도서관 옆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힘겨운 공부를 끝낸 후 혼자 내리막을 걷고, 버스에 혼자 올라타는 날이 2주가 넘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J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었다. 빈 2인석을 두고 1인 좌석에 앉았다. 병욱의 연락 없음과 빈자리에 익숙해지려 할 때쯤 그가 다시 나타났다.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하하, 공부 잘하고 있었어?”

 J는 샐쭉거리는 표정으로 병욱을 흘겨보다 ‘무슨 일이었냐’는 물음을 던졌지만 병욱은 끝까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허허’ 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에 J는 얼굴이 굳었고, 그만 마음도 닫아 버렸다.

 이듬해 J는 겸사겸사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병욱은 학원에 취업하여 국어를 가르치며 틈틈이 임용 공부를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백석과 황지우를 말하고 김광석을 듣던 둘의 장면은 51번 버스와 179번 버스 허공에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둘은 희미해져 갔다.



# 3

병욱에게.


 겨울이다. 나는 요즘 눈이 오길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누군가가 SNS에 올린 눈 인증샷만 주야장천 본다. 역시 남쪽에서 눈을 보기란 참 쉽지 않나 봐.

 시간이 참 많이 지났지? 몇 년 전, 네 소식을 전해 들은 적이 있어. 임용고사 합격 근처까지 갔다가 고배를 마셨다는 이야기. 내가 놀랐던 건 고배를 따라준 이가 면접관이 아닌 너였다는 사실이었어. 수업 실연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떳떳하지 않게 느껴져 그 자리에서 인사를 하고 시험장을 나와버렸는 말을 듣곤 한편으론 ‘아, 역시 병욱이 답네.’ 생각을 했지 뭐야. 정말이지, 너 다웠어.

 네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쓰던 단어가 ‘오롯이‘ 였잖아. 그래서인지 너를 떠올리면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시가 떠올라. 겨우내 영하의 온도를 버티어내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결국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는 그 나무 말이야. 너는 그 오롯함으로 어떤 요즈음을 살고 있니?

 연락이 되지 않다가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을 때, 나의 서운함을 표정과 행동으로 마구 분출하던 것이 이제 와서 무안하고 미안해. 그땐 나도 참 어렸어서 ‘그럴 수도 있지. 말 못 할 일이 있겠지.’ 하는 너그러움을 장착하지 못했던 것 같아.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너를 품어주었다면, 있는 그대로의 너를 기다려주었다면 우리는 좀 더 오랜 시간 친구일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땐 대체 무슨 일이었니?)

 살면서 몇 번의 눈을 더 볼지 모르겠지만 2011년에 함께 맞았던 눈은 손에 꼽힐 기억일 거야. 그날 우린 얼마나 생기 넘치고 젊었니! 흘러가버린 시간만큼 우리가 다시 가까워질 수는 없겠지만 그 옛날 네가 말했듯 나의 기쁨, 슬픔, 외로움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너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내게 남아 있어. 넌 내게 정말 귀한 친구였어, 병욱.


fro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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