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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솔 Jan 06. 2023

삼분의 일

부모와 자식에게 공통으로 허락된 시간


지난가을, 97세의 연세로 할아버지께서는 생을 마감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은 날씨가 정말 말 도 못 하게 좋았는데, 사람의 죽음과 눈부시게 좋은 날이라는 사실이 너무 대조적인 것 아닌가 생각했다. 세상이 꼭 한 인간의 삶의 마지막을 비꼬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무언가 크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 그 자체였다. 물론 이건 전부 다 내 예민한 탓일 수도 있으나, 내 마음을 더 기괴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그날 어른들은 (마치 모두가 입을 맞춘 것 마냥)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했었다. 할아버지가 참 좋은 날 가셨다며, 어쩜 이렇게 좋은 날로 잘 골라 가셨냐며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는데. 대체 저게 다 무슨 말이람. 영화 신세계에서 중구형이 뱉었던 ‘죽기 딱 좋은 날씨네’ 같은 대사를 리얼 현실에서도 하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죽는 날에,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는 그 순간에 과연 좋은 날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당사자는 더 살고 싶었을 수도 있을텐데. 혹시 나만 죽음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나 싶으면서도 인생은 태어나는 날부터 사망하는 날까지 잘 골라 죽어야 하는 선택과 복불복의 연속이구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물론 어른들의 말들이 이해못할 말들은 아니었다. 장례식이라는 상황에 나보다 비교적 익숙한 어른들의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일종의 바이브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계속 곱씹을 수박에 없었다.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는 그 말을 나는 왜 계속해서 생각했던 것일까? 당시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그때의 그 기분을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의식하기도 전에 훨씬 더 빨리, 무의식에서부터 내 부모의 죽음을 자동적으로 연상 지어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과연 내 부모가 죽는 날, 공교롭게도 그날의 날씨가 무척 좋을 때, ‘우리 엄마 참 좋은 날 가셨네’, ‘우리 아빠 좋은 날로 잘 골라가셨네’라고 덤덤하게 말할 수 있을까? 더 살아봐야 아는 거겠지만 당장은 저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할아버지가 정말로 숨을 거두시기 직전, 할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는 소식을 접했던 그날, 나는 자동적으로 할아버지의 나이를 셈했다. ‘97세면 엄청 오래 사셨구나...’라며 꽤나 담담하게 생각을 한 나와 달리, 아빠는 한숨으로 숨을 쉬듯 ‘조금만 더 오래 살다 가시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주문 외듯 연속적으로 내뱉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할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의 횟수는 무려 97년. 100년에 가까운 절대적으로 긴 시간. 그렇다. 내 부모가 자식들을 생각해 운 좋게, 좋은 날로 골라 죽는 날은 있을지언정 자식에게 부모가 죽는 날에 충분한 날은 결코 없을 거라는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래로 엄마 아빠와 함께 보낼 수 있는 남은 시간에 대해 의식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모르나, 지금처럼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90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살아온 시간은 삼분의 일, 엄마 아빠가 살아온 시간은 삼분의 이 그리고 그 사이에 엄마 아빠와 나에게 공통으로 허락된 시간, 삼분의 일.




내가 내 인생의 삼분의 이를 살아갈 즘, 내 부모는 삼분의 삼을 가득 채워 떠나겠지. 왜인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한숨으로 숨을 쉬듯 좀 더 오래 살다 가셨으면 좋겠다는 아빠의 말이 내 입에서도 자동 문장 완성처럼 튀어나온다. 앞으로 남은 시간 삼분의 일. 나는 이 시간을 웬만하면 행복하고 좋은 시간으로 더 많이 채워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과 의무감이 든다. 그 시간도 온전한 삼분의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 할 수 있는 그 시간을 나는 후회로 채우고 싶지 않다.




이제는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더 생각하지 않아도 잘 안다. 아무도 몰라 외로울 그 길, 혹여나 춥고 씁쓸한 그 길에 날이라도 따뜻하길 바라는 어른들의 염원이었을 것이라고. 그런 거라면 나도 할아버지가 날 좋은 날 가셔서 참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날 또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처럼 눈부시게 좋은 날이었으면 좋겠다. 꼭 세상에 속은 기분이 들게. 그날의 죽음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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