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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날이었다.
일은 바빴고, 하루는 지루하게 흘렀고, 타지 생활에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그냥, 누군가와 따뜻한 밥 한 끼가 지독하게 먹고 싶었던 날. 친한 동생에게 말했다. “그냥 사람 하나 소개해줘. 성별 상관없고, 대화나 나눌 누군가.”
정말 말 그대로, 외로움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이 말했다. “언니, 이 사람 얼굴 진짜 잘생겼어. 키 크고 운동도 해. 근데 언니 취향은 아닐 수도 있어. 일단 나가봐.”
기대도 의지도 절반쯤만 있는 상태로 나간 소개팅 자리. 그런데 진짜, 너무 잘생겼다. 첫인상은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로 선명했다.
키는 180 중반, 몸은 적당히 단단했고, 이목구비는 진하면서도 정돈돼 있었다. 말투는 조곤조곤하고, 옷차림도 단정했다. 옷을 잘 입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좋았다. 깔끔하고 수더분한 느낌이 괜히 깔롱 부리는 스타일보다 더 내 취향이었다. 어차피 고집스러운 스타일이 아니라면, 내가 옷을 골라 줄 수도 있으니까. 훗날 데이트에서, 그냥 기본템만 입었는데도 눈에 띄게 빛났다. 역시 중요한 건 패션보다 얼굴과 체형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AI와 너무 열심히 일해서였을까. 그날은 마치, AI가 내 이상형을 출력해 준 기분이었다. 소개팅 당일, 처음 본 사이에 나는 주접을 입에 달고 있었다.
“유전자 기증 가능하신가요?”
“이런 유전자는 널리 전파해야죠.”
“다산해야죠, 이건.”
다산을 꿈꾸는 타입도 아니면서, 이 사람이라면 그래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민망하지만, 그날은 그랬다. 나이 차이도 있었고, 직업적으로도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따분한 일상 속에서 AI가 출력해 준 결과값이 너무 마음에 들어 내가 조금 들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맙다, 친구야.
역시 사랑 앞에서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같이 있는 동안, 마음이 오랜만에 편했다. 그의 체취와 성격에는 내 신경을 긁는 어떤 거슬림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데이트로 이어졌다.
두 번째 데이트.
그는 운동을 마치고 왔는지, 조거 팬츠에 흰 반팔티 차림이었다. 운동남이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체육복을 입어도 잘생긴 남자는 모두의 이상형일것이다. 그 덕에 체육복을 입었음에도 첫 만남보다 오히려 점수를 더 얻었다.
정갈한 자동차와 운전 실력도 인상 깊었다. 나는 자동차 내부에 물건이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의 차는 정돈돼 있었고, 키링이나 자잘한 장식 같은 것 없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함께 간 학교 운동장 산책에서는 지난 연애와 그동안의 삶에 대한 소소하고도 진지한 대화도 나눴다. 그때는 그 동네가 낯설어서 감이 잘 오지 않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어디쯤인지 알겠다. 낯선 도시에서, 낯설게 시작한 데이트.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 데이트.
소고기를 구워주고, 밥도 비벼주던 오빠는 테이블 대각선에 앉았다. 나랑 사선으로 대화하는 기이한 포지션. 처음엔 ‘뭐지?’ 싶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살짝 정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 주에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께까지 “이런 남자친구 어떤 것 같냐”고 여쭤봤을 정도였다. 할아버지 말씀이 기억난다. “그냥 편하게 앉고 싶었던 거지, 나쁜 의도는 없어 보이네.”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나인걸. 어쩔 수 없었다.
2차로 오빠가 “술 한잔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 함께 마셨고,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더 열렸던 것 같다.
집을 걸어서 데려다주던 그는 결국 걷기 힘들다며 택시를 불렀고, 우리 집 앞에 나를 내려준 후 다시 택시를 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통화했다.
“더 알아보고 싶은 거면 말해줘. 나는 기다리는 거 잘 못 해. 이제 노선 정해주면 좋겠어.”
내 말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귀엽다 진짜. 마음은 이미 정했는데, 고백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후회된다. 오빠가 너무 예뻐서, 조금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너무 쉽게 “그래요, 오빠. 내 거 하세요.”라고 해버렸다. 그냥... 내가 조금 더 여유를 가졌다면. 더 간을 봤다면. 이 사람이 나에게 더 오래, 더 깊게 다가오게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렇게,
조금은 쉽게,
내 눈에 너무 잘생긴 남자와의 연애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