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화
오늘은 정말 별일 없는 무난한 하루였다. 크게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은. 아무렇지 않고 무난한 날이었지만 나는 그날 밤 걱정에 잠식되어 조용히 침수되었다. 머릿속에서 나의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확산되었고 나는 어느새 침대 속에서 착은 파도에 힘쓸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은 늘 손 닿을 곳에 있었다. 해가 뜨기 직전에서야 겨우 걱정을 온몸으로 밀어낸 뒤 간신히 눈을 감았다.
당신도 걱정에 밤을 지새우는 날을 보내곤 하나요?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도 아빠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집은 걱정이 많아서 참 속상하다. 걱정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의식적으로 걱정을 내려놓고 조금은 가볍게 살아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걱정을 내려놓는게 말처럼 쉬냐.'라고 생각하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빠의 수천번의 반복된 조언 덕분에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지속된 나의 노력으로 조금 더 무던해지고, 피로도가 낮은 삶이라는 결실이 오길.
내 걱정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학창시절에 종종 문제가 됐던 친구들과의 관계일까, 혹은 입시 실패에서 오는 상실감일까?
확실한 것은 두가지 문제 모두 여전히 미제사건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으며, 나는 최근이 되서야 그 오래된 잔재들을 정제하기로 비로소 다짐했다는 것이다.
대학이라는 목표에 실패한 나는 한동안 꿈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다.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꿈을 잃은 나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삶'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나는 살아가는 태도조차 단순해졌다. 마치 pass/fail로만 결정되는 시험처럼.
더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저 fail만 피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지 않고 가볍게 임했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꿈은 모두가 꿀 수 있지만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달까.
평범한 사람이 높디높은 이상을 품는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그걸 깨달은 방전되어 버린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 중 하나인 '자기 장애' 전략을 선택했다.
대충 살아간다면 나는 애쓰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스스로 더 큰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 오랜 시간 꿈은 없었지만, 대신 눈에 보이는 것들-원하는 남편, 원하는 물건 같은 것들에 욕망을 품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위축되었고, 내가 가진 모든 장점이 초라해 보였다. 자존심상 원하는 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최소한 좋은 직업은 가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방황을 잠시 접어둔채 졸업 시험과 취업 준비를 병행했다.
평소 삶을 아끼는 나였지만 그 시절만큼은 생각했다. '이 직업조차 갖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 물론, 마음 한켠에서는 '죽고 싶지 않아. 그때는 남한테 보여지는 것말고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직업을 찾아서라도 살아가야지.'라며 현실을 타협하기도 했다.
이전의 실패들은 어쩌면 내게 '견디는 힘'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버티고, 또 버티는 힘.
이건 나에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래서 나는 악착같이 마음을 죽여가며 버텼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사회에 발을 들였지만 여전히 나는 걱정 속에서 살았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처음에는 하나로 보이던 걱정은 형태를 바꾸며 수백가지의 다른 불안으로 변주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는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함을 인지했다.
나는 내가 바라던 최소한의 직업을 가졌다. 물론 지금 와서 돌아보면 다른 길을 찾아봤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이미 방전된 상태였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내가 가끔 직업적 소명의식이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져 스스로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요즘은 자꾸 퇴근 후 삶에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직업적 소명의식에 대한 고민은 늘 내 마음 한편에 조용히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모든 걱정과 후회 속에 머무르는 것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걱정하느라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놓치는 건, 더 바보 같은 일이라는 걸.
너무 먼 미래보다는 가까운 미래와 현재에 집중하자.
걱정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게.
걱정 많은 내가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