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사직서를 냈다
스여일삶 월간 회고모임 #4
4월은 1년 중 가장 설레고 들뜨는 달이다. 충분한 생일을 겪어본 나이이거늘, 그래도 붕 뜨는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그런 4월에 기어코 사직서를 냈다. 그거 하나로 한 달이 전부 정리되는 기분.
사촌 오빠의 결혼식으로 엄마랑 동생이 서울에 올라왔다. 갱년기로 고생하는 막내이모 위로 겸 이모들이랑 피크닉을 제안했고, 여의도에서 꽃길을 걷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서 나눠마시고, 꽃나무 그늘 아래서 실컷 웃고 떠들었다. 기꺼이 함께해 준 남편덕에 조금은 더 기분 좋게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었던 시간. 결혼을 하고 보니 40대, 50대, 60대.. 엄마의 삶, 이모의 삶, 시어머니의 삶, 진짜 어른들의 삶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 호기심이 생긴다. 그들이 조금은 덜 외롭고, 그들의 하루하루가 조금은 더 풍요롭기를. 동생 놈이 기특하게도 예전에 서울에서 같이 살던 동네에서 내가 너무 좋아했던 생크림 케이크를 통으로 사가지고 왔다. 중순에는 우연히 부산에 내려가게 되어 엄마 집밥까지 받아먹고, 아주 가족 가족했던 월간.
지난 11월의 시끄러운 일 이후, 퇴사자고 속출하고 있는 만큼, 서른 즈음의 가사처럼 거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내 서른 즈음은 김광석아저씨보다 조금 늦게 온 걸까.. 아니면 은유적인 이별로도 충분한 인생에, 이별의 파도 아니 쓰나미를 맞이한 내 운명일까-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남는 선택을 한 사람들과 몫을 나누며 톡톡히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 마저도 착각이라는 현실감이 물밀 듯 밀려와, 나 또한 '능동적인 선택'인 이별을 하게 되었다. 아직 팀원들한테 말도 못 했는데 다음주가 너무 무섭다- 트리거라고 할만한 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여러 가지가 온통 내 기운을 빼놓는 통에 무기력감이 속수무책으로 온 것이 가장 큰 타격이 아니었을까-
13년을 노브레이크로 5개의 회사를 전전하며, 숨 막힌다 싶게 정성 들여 관리해 온 커리어다. 거취를 정해두지 않고, 쉬면서 '좋은 직장'으로 이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말로 긴 휴식을 가져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발 좀 쉬라는 후배들의 말에 '쉬면 뭐 하면서 쉬어야 해?'라고 대답했다가, 쉬는 건 그냥 쉬는 거라고 핀잔을 들었던 나였다. 1) 하던 일을 이어서 하며 조그맣게 창업을 하는 방법도 있고 2) 이보다 더 작은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방법 3) 아예 대기업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 4) 말도 안 되지만 이참에 전업 유튜버를 꿈꿔보는 것 5) 아예 모든 일을 다 접고 내가 좋아하는 요리로 새로운 일을 도모해 보는 것 등등 아마도 그보다 훨씬 더 수많은 선택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운이 빠질 대로 빠져버린 지금의 나는 그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런 원초적인 질문에조차 답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내 인생'이 맞는지, 아님 내가 되고 싶은 어떤 모습을 연기하며 살아온 건지 헷갈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일단 퇴사, 일단 후퇴' 궁지에 몰리는 그 순간까지 차근차근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 바람으로 쉬어본다.
기분이 좋기만 할 리 없는 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남편덕에 내 트레이드마크인 '지나치게 심각해지기' '지나치게 생각 많이 하기' '지나치게 우울해하기' '지나치게 사람 무서워하기' 등등에서 한걸음 벗어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오히려 조금씩 더 활기를 찾아가고 있달까- 내 생일 기념 급으로 떠난 경주 여행도 맑은 공기 속에서 더없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뜻밖의 인생 탕수육까지 발견하고 왔다-
이렇게 노력하는 남편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굳이 굳이 근사하게 차려낸 외식 같은 집밥. 아이처럼 행복해하는 이 사람 앞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해짐을 느낀다. 밥 한 끼에 꽤나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게 아까워서 매번 인스타에도 열심히 업로드하는데, 날이 갈수록 지인들의 반응이 따뜻하고 열렬해지고 있어, 요리에 대해서도 조금씩 자신감이 쌓인다. 자신 있게 취미라고 할 수 있는 나만의 것, 처럼 느껴진달까. 이렇게 집밥을 즐겁게 해 먹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며, 요것이 나만의 콘텐츠가 될 수도 있겠다는 부푼 꿈을 같이 끌어안아 본다. (오 근데 이번달에는 메뉴가 좀 많네 뿌듯-) 갑자기 불러 순위를 매기라니 1 초당 냉파스타 2 수육 3 피스타치오 딸기 토스트 -라고 해놓고 등수를 매기는 게 마음 아프고 힘들단다. 귀여운 것
주말 아침 눈뜨자마자 씻지도 않고 꽃시장에 다녀왔다. 평소라면 시도해보지 않았을 쨍한 핫핑크에 오묘한 보랏빛이 도는 꽃을 골라 들고, 집에서 쉬고 있는 화분에 심을 식물도 몇 개 사가지고 왔다. 이번에 골라 담은 이름 모를 꽃들의 수명은 채 5일을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거실을 오고 가는 내내 '내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에 대한 묘한 쾌감을 느끼며 꽃들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유행했던 질문, 보통 가족에 세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에 다행히 아무에게도 버림받지 않았다. 바퀴가 돼도 안 버린다는데 까짓 거 백수 그거 뭐 대수라고! (그래도 버림받을 까봐 한껏 쫄았던 건 사실)
광고주들에게 인사를 다니고 있다. 고생했다고- 그때 정말 즐거웠다고- 추억하며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마무리도 이렇게 잘-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그리 무서워서 피하려 했던 내가 좀 부끄럽기도 하다. 다음 주엔 크리에이터들, 그리고 팀원들 남은 5월 한 달 동안 정말 정말 좋은 이별들을 하고, 5월 회고 때 자랑스럽게 뿌듯하게 찜찜함 없이 기록해야지! 대학생 때 동아리를 같이 했던 업계 후배도 뜬금없이 연락이 닿아 만나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힘을 얻고 왔다. 세상에는 구석구석 숨어있다 필요할 때 나타나는 천사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
생일 선물을 챙겨줘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는 남편이 샤넬백을 사주겠노라고 손을 이끌고 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오픈런을 해야 한다며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까지 하고 룰루랄라 나갔는데 이상하게 금방 집에 드어오고 싶더라. 결국 잠수교에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생일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내 생일을 맞을까 봐 남편은 초조해했지만, 프러포즈 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샤넬백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질 않았다. 샤넬백대신 2달 정도 백수가 되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때는 퇴사 확정 전)
그 대신 며칠사이에 갖고 싶은 것이 생겨나고 있다. 백수 생활동안 콘텐츠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메라, 좋은 데스크탑, 인테리어를 도와줄 테이블 따위들. 아직 어떤 친구를 들일지 정하지는 못했지만, 가급적이면 내가 유지해야 하는 삶보다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을 택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최종 생일 선물은 과연 뭐가 될까?! 두구두구두구두구 결론은 다음 달 회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