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 Jul 04. 2024

최전방, GOP 그녀

"다른 사람이 정리할 것이 없도록 방안에 남겨두었던 것이 없었어요."

물건 없는 그녀의 방을 떠올린다. 남편과 아이들은 그녀의 방이 극단적일 만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이유를 알고 있었을까. 정갈하여 빈틈없어 보이도록 군복을 입고 방에서 나와 최전방으로 향하는 그녀가 보인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독서토론을 하는 시간이었다. 진행자는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참여자들에게 죽음에 대해 평소 얼마나 생각하는지 물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이 대부분 '죽음'에 관한 내용임에 묘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말했다.

"저는 죽음이란 말이 제 대표단어라고 할 만큼 자주 생각해요."

말하고 나니 괜히 뿌듯했다. '내가 이렇게 죽음을 숙고하며 밀도 있게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속내를 뽐낸 것 같았다.


진행자는 내 말에 이어 질문했다.

"달하님 평소에도 죽음을 자주 생각하신다면 아이들을 대할 때 관대해지시나요?"

"네, 관대해지지요."


진행자를 제외한 5명의 토론 참여자들이 위 질문에 대해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그녀의 차례가 되었고 그녀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장교로 일하다 제대했어요. 예비역입니다."


내가 속한 독서토론모임의 참여자들은  자신의 발언내용을 뒷받침하는데 필요할 때만 자신을 드러냈기에, 그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녀를 도시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정도로 알고 있었다. 토론 시 말하는 내용에 비추어 심리학, 여성학을 공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를 미루어 짐작했다. 최전방, GOP에서 근무했다던 그녀의 오늘 이야기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녀는 죽음에 대해 평소 얼마나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이어갔다.


"제가 최전방에서 근무했던 그때 몇 달간 북측의 도발이 잦았었어요.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저희들은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사상교육을 받았지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 명예롭게 전사한 엄마로 기억되길 바랐습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방의 모양새가 단촐해졌습니다. 내가 죽게되면 다른 사람이 내 방을 정리하는데 수고롭지 않도록 매일 방을 정리했어요.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로 기억되자고 매일 다짐하고 노력했습니다. "

그녀는 그야말로 내일 자신이 이 방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방을 정리했다고.


내 방을 둘러보았다.

방 곳곳에 읽다만 책이 들쭉날쭉 쌓여있고 커피가 들어있었던 머그컵이 쌓여있다. 나는 늘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며 살자'는 문장을 품고 산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현실을 통해 좀 더 진실한 쪽의 내가 드러났다. 내 방은 죽음이 멀다 느끼는 사람의 방이었다.  

아이들에게 관대하다는 말을 내뱉었던 것도 창피해졌다. 우리 아이들은 10개월, 네살로 이들에게는 '관대하다'라는 표현을 쓰기에도 사실 쑥스럽다.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의 '관대함'과 비견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역을 하고 현재 사는 모습을 얘기하며 웃었다. 지금은 아이와 실랑이도 하고 그때처럼 죽음을 생각하진 않는다고. 그녀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큰 면을 이룬 것은 그때이고 그녀가 견뎌낸 덕분에  지금의 삶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비장한 삶을 산 사람이 느끼는 안락함이야말로 축복이지 않을까.  


매일매일 비장하게 살고 싶다던 20대의 나는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비장한 삶'이라 함은 지금의 나에겐 멋지지만 어려운 삶의 모습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께는 마음 한켠에 존경을 보내며 슬며시 다른 삶을 바라본다. 진지함 속에 가볍고 유쾌함이 공존함을 매일 느끼고 진정한 사랑과 해학을 발견해나가는 삶. 그것. 더불어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