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새옹지마 속 '새옹', 그 변방 늙은이를 추앙하며 살았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 태연자약의 화신. 초연한 사람은 땅 위로 둥둥 떠올라 감정들에는 발을 빼고 살 것 같지만, 내 상상 속 그는 그렇지 않다. 고사성어 속 일화에서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기쁜 내색도 슬픈 내색도 하지 않지만 내 머릿 속 그는, 또 좀 다르다. 그 역시 자식이 말을 타다 떨어져 불구가 되었을 땐, 왜 내 아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냐며 분노하며 울고, 그 일로 아들이 전쟁터로 징병되지 않았을 땐 잠시나마 미소 짓는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선연히 물들면서도 초탈한 ‘나의 변방 할아버지'다.
내가 경험한 적 없어 빈약하게 상상해야 하는 영역에서, 그는 어떤 사람일까. 감정은 충분하고 분명히 느끼며, '자신이 원하는 일들로만 삶이 진행되지 않는 걸 안다'고 하늘에 대고 말한 사람일까. 그의 앎의 차원에서는 어떤 세계가 펼쳐지고 있을까.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면서도 한 동안은 잊고 지냈다. 그는 별일이 있을 때 주로 내 삶에 나타나니 그간 무탈했나 보다. 며칠 전 지비츠 플라스틱 고정판이 왼발 엄지발톱을 들어 올려 통증이 밀려들었을 때, 물결에 실려 그가 다시 왔다.
크록스 신발을 예쁘게 꾸미는 액세서리, 지비츠를 구매하고 1달 정도 지난, 비 오는 아침이었다. 밋밋한 크록스에 긴 속눈썹을 붙였다고 좋아하며 길을 걷다 미끄덩, 왼쪽 발이 크록스 안에서 미끄러졌다. 둥근 플라스틱 고정판이 발톱 밑으로 들어가, 들어 올렸다. 정확도가 금메달감이었다.
"어휴..."
발톱이 덜렁대며 인사를 했고 그를 맞은 정형외과 의사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고정테이프로 붙여놨어요. 나중에 고생 안 하려면 붙어서 아물어야 되니까 걷지 마세요. 걸으면 발톱 또 들려요."
"네? 저 애기 봐야 되는데요."
처치가 끝나고 나가려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측은한 눈길을 받으며 "엄지가 땅에 닿지 않도록 뒤꿈치로 걸으라"는 타협을 얻었다. 간호사가 베이지색 코반으로 왼쪽 발가락을 동여매 고정했다. 드레싱으로 얻은 왕따봉 엄지발가락 때문에 앞코가 막힌 크록스를 신을 수 없었다. 도보 10분 거리에 집이 있다, 으랏차, 스스로를 달래고 맨발로 아스팔트를 걸어 집으로 향했다.
'이 사람들이 지비츠 고정판을 플라스틱으로 만들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비 오는 날 왜 크록스를 신고 나가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우는 아가를 안고 분유를 타다가, 머릿속이 웅웅 거려 와락 소리를 질렀다. 그야말로 샤우팅을 내질렀다. (어디선가 배운것들이 와르르 섞였다!)
"이 정도 다친 게 다행이다, 와 감사하다!",
"정형외과가 코 앞에 있어! 감사하다!"
다행히 집엔 아가와 나 우리 둘 뿐이었다. 아가가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내지른 소리들이 작동했는지 ‘아가가 안 다치고 내가 다쳐서 다행이지.'라는 생각을 이끌어냈다. 그의 까만 눈을 보며 평안에 이르렀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8시간, 발톱을 다치고 새옹지마를 떠올리는데 긴 시간이 걸렸다.
발톱사건 전까지 지비츠는 나에게 행운같은 기쁨이었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사진전에 가려고 몇 년 만에 들른 사당역에서, 우연히 본 액세서리집이 마침 할인행사 중이었고, 거기서 평소에 사고 싶던 지비츠를 싼 가격에 샀다. 러키비키! 신발에 액세서리를 달고 며칠은 더 사뿐 대고 걸었다.
행운은 얼마 가지 않았다. 나는 곧 발톱을 다쳤고 그것은 '예쁜 쓰레기'로 전락해 즉각 처분당했다.
내가 지비츠를 두 번 다시 사나 봐라. 씩씩거리며 가족들의 신발을 들췄다. 거기에 매달린 지비츠들의 목을 날리겠단 생각이었다. 지인 단톡창에도 지비츠 경고메시지를 보내며 그것을 향한 화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렇게 며칠 푸념하듯 염을 했다.
걷기를 최소화하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뒤꿈치로만 걸었다. 모든 외출 약속을 취소하고 어쩔 수 없이 집에 눌러 앉았다. 모처럼 길게 앉아 글을 썼고, 그렇게 또는 그래서? 중편분량의 첫 소설을 끝맺었다. 지인께 읽어주시길 부탁하는 메일을 드려놓고 일단 첫 단락을 지었다. 수정할 게 한 트럭이겠지만 생각보다 빨리 이야기를 마쳤다.
줌미팅으로 안부를 나누던 아는 동생이 내 이야기를 듣고는, 언니 그럼 발톱 다쳐서 소설 마칠 수 있던 거 아녜요?라고 물었다. 그치그치,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라고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내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인과는 일단 그거라서 그렇게 생각하려고. 그런데 내가 모르는 차원에서는 또 모를 일이야. 어쩌면 발톱을 다치지 않았다면 더 '좋은 일'들이 이어졌을 수도. 아니면 발을 다치지 않았어도 나는 글을 잘 완성했거나. 결국 모든 걸 경험할 순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석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밖에 없겠더라고.
(남편이 우리의 줌미팅 대화를 듣고 가림막 너머로 슬쩍 나를 쳐다본다. 나와 친구 몇은 실제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내일 시간 되는 사람 모여. 하고는)
우리의 뇌는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납득가능한 원인과 결과로 풀어내길 좋아한다. 뇌가 소모하는 에너지가 줄어드니까. 그런데 실제로 내가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인과가 얼마나 될까. 내게 지비츠는 기쁨이었지만 쓰레기로 전락했다. 곧 나는 그것이 만들어준 환경 덕분에 글을 마무리했다고 해석했다. 어디부터 원인이고 어디부터가 결과인 건지. 어디부터가 '화'고 어디부터가 '복'인 건지.
미래는 알 길이 없다지만 한 가지는 희미하게 알 듯하다. 전화위복과 새옹지마가 죽을 때까지 반복될 거란 것.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끝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 세상은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들 투성이고 그래서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 일어나는 일들에 내가 한 행동이 더해져 결과에 이르고 다시 어떤 일의 원인이 된다. 그 속에서 우리의 정체는 순간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 해석이 모두에게 친절했으면 좋겠고 부여한 의미들은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은 지비츠에 발톱을 다쳐 글 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해석할 참이다. 나에게도 친절하게, 풍성한 의미를 부여할 채비를 하면서 말이다. 이외에 다르게 할 재간이 없기도 하지만.
* 새옹지마(塞翁之馬) : 새옹의 말. 즉 변방 노인의 말처럼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될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