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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Jul 13. 2024

왜 방목계란은 비쌀까?

방목과 방치 그 사이 어딘가

한국에서 혼자 살 때는 계란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지 몰랐다. 

계란이라고는 판에 든 누리끼리한 계란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결혼 후 미국에 와보니 마트에는 늘 흰 계란과 갈색 계란이 함께 있었고, 일반계란부터, 유기농계란, 방목계란 종류도 참 다양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별 고민 없이 가장 싼 계란을 사 먹었다. 12개들이 한 판에 단돈 1달러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물론 코로나로 인한 인플레이션 전 이야기이다.) 

아이가 생기자 계란을 고르는 기준에도 변화가 생겼다. 계란과 우유처럼 자주 먹는 음식들은 적어도 유기농, 좀 더 여유가 된다면 자연방목으로 키운 닭의 달걀을 먹여야만 면역력이 좋아지고, 영양분이 풍부하다고 했다. 

그걸 몰라서 그동안 내가 방목계란을 안 먹은 건 아닐 터인데, 왠지 아이에게는 먹여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이래서 아기용은 뭐든 비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리나 보다. 


Pasture rasied라고 적힌 방목계란을 마트에서 발견했지만, 선뜻 집어 들기에는 가격이 너무나 비쌌다. 12개 들이 한 판에 7불이 넘었다. 

같은 계란이 왜 이렇게 비싼 건가 문득 궁금해져 리서치를 해보니 Pasture-raised 라벨을 달기 위해서는 닭들이 잔디나 풀이 있는 목초지를 밟으며 흙에서 나오는 벌레와 지렁이도 잡아먹으며 최대한 자연적인 방식으로 키워져야 한다.  방목된 닭들은 심심하면 나뭇가지에도 올라가고, 알을 품기도 하면서 본능에 충실하게 산다.

공장식 닭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이렇게나 좋은 환경에서 자란 닭이 낳은 달걀이 바로 '방목란'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먹는 사료의 유기농 인증이 더해지면 우리가 사 먹을 수 있는 가장 비싸고 귀한 달걀인 '유기농 방목계란 (Organic Pasture-raised)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건강한 닭을 키워 가치 있는 계란을 얻는 '방임적 방법'은, 건강한 인간을 길러내는 데도 검증된 효과를 가진다. 

방임적 교육을 할 때는 '놓아기르기'라는 뜻에 걸맞게 부모가 쳐놓은 좁은 안전지대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선택지와 자유, 그리고 지지를 적절히 그리고 충분히 제공하는데 포커스를 맞춘다. 그리고 아이가 결정한 선택과 행동에 있어서는 간섭을 최소화하면, 아이에게 독립성, 자율성 그리고 주도성이 모두 자라나는 마법 같은 일이 있어난다.

  

몬테소리 교육의 창시자인 마리아 몬테소리에 따르면 모든 아이는 태생적으로 독립적으로 싶어 한다. 게다가 독립적인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독립성에 대해 끊임없는 긍정적인 강화를 받는다. 부모로부터 넌 정말 혼자서 뭐든 알아서 하는 손 안 가는 아이라는 칭찬, 주변 어른들의 그 집 딸 같은 애는 열도 키울 수 있겠다는 부러움, 넌 뭐든 혼자서 잘하는 것 같아 멋있어라는 친구들의 인정 같은 것 말이다.


독립성이란 모두가 보유하고 싶어 하는 능력이자, 그 안에 단점 따윈 없는 절대선처럼 느껴진다.


이쯤 되면 본능적으로 독립적이길 갈망하는 아이에게, 뭐든 스스로 할 수 있는 독립성 강화시켜 주는 교육은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생애초기의 기억이 남아있는 시점부터 일평생을, 나를 "독립적인 사람"으로 정의 내리며 살아왔다. 

엄마는 어린 내가 낮잠을 자는 동안 목욕탕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며 내가 얼마나 순한 아기였는지 강조하곤 했다. 숙제를 한 번도 봐주지 않아도 혼자서 척척 알아서 챙겼고, 도서관에 데려간 적도 없는데 하교 후에는 늘 친구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오곤 했다고 했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가고, 바로 취업을 하고 늦지 않게 결혼도 하고, 정말 혼자서 알아서 잘 컸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내 시점의 기억으로 돌아가보았다.

엄마는 말썽꾸러기 오빠가 혹시 선생님께 혼날까 숙제를 대신해주곤 했다. 저녁밥때가 되면 오빠를 붙잡아 오라며 종종 나를 오락실로 보냈다. 안 가려는 자와 데려오려는 자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이 오락실을 가득 채우곤 했고, 지금까지도 나는 오락실에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금방이라도 우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위태위태한 엄마를 지켜보며, 짐이 되지 말아야지, 나라도 중심을 잡아야지 하며 괴롭고 힘든 감정을 내 안으로 삭이고 또 삭였다. 나는 14살이었다.  그렇게 사춘기에 제대로 된 지랄 한 번 떨어보지를 못하고 성인이 되었다. 

대학을 가며 집을 떠나 때론 1년마다, 길게는 2년마다 수많은 이사를 했지만  집을 보러 다닐 때도, 부동산에서 집을 계약할 때도, 이삿짐을 나를 때도, 집정리가 되고 나서도 엄마는 나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별 거 아니야."라는 말을 달고 살던 나는, 정말 괜찮았던 걸까?


참 손이 안 가는 아이, 알아서 혼자 잘하는 딸, 의젓하고 똑 부러진 사람이라는 칭찬은 족쇄였다. 

나도 누군가가 날 데리러 올 때까지 오락실에서 놀고 싶었고, 아빠 잃은 슬픔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나이 들어서 후회할 게 뻔하지만, 사춘기이기에 할 수 있는 반항도 해보고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삿날에는 엄마가 잔뜩 해온 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며 "안 먹는다니까 왜 이런 걸 해와."라고 퉁명스럽게 굴다가도, 여기도 더럽고 저기도 더럽다며 잔소리를 한가득 뿌려 바닥을 박박 닦고 있는 엄마에게  "청소 그만하고 짜장면이나 먹자 이제!" 라며 잔소리폭격을 능청스럽게 넘겨버리는, 그런 이사를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치가 있는 것은 푸릇푸릇한 목초지에서 놓아 먹인 닭에게서 나온 계란이지, 풀 한 포기 없는 흙바닥에서 놓아기른 닭에게서 나온 계란이 아니다. 우리는 전자를 방목, 후자를 방치라고 칭한다.

20대의 나에게 누군가가 어쩜 그렇게 독립적일 수 있냐고 물으면, 엄마가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키워준 덕분이라고 웃으며 얘기했다. 그 덕에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많아졌고, 그 덕에 어린 나이에 많은 걸 경험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혼자 힘으로 삶을 헤쳐 나가는데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그 시련과 상처들이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위인전에 나올 법한 말들을 우수수 쏟아냈다.

정말 내가 그런 우수한 방목교육의 수혜자라는 정신승리는 오랜 시간 유효했다. 


아이가 만 세 살이 되자 몬테소리 유치원에 보냈다. 독립성을 절대선이자 자부심으로 갖고 살아온 인간으로서, 내 아이에게도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한국에서 교사로 일할 때도 늘 관심이 있었던 교육방법이었기에 학교를 보내면서 몬테소리 교육에 대한 더 알아갈 기회라고도 여겼다.

밥하고 애 키우느라 생각처럼 부지런하게 몬테소리 교육을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초보엄마는 몬테소리가 얘기하는 '교육 십계명'을 부적처럼 냉장고에 붙여놓았었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 한 아이에 대한 접촉을 절대로 삼간다.

아이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아이에 대해 절대로 험담하지 않는다. 

아이의 좋은 점을 살리고 장점을 개발하는 데에 주력한다. 

양질의 학습환경을 조성하고, 항상 정성을 다해서 아이를 도울 준비를 한다.

아이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아이의 실수를 받아들이고, 아이가 자신의 속도에 맞게 공부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하며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

아이가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다양한 활동들에 도전해 보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인내심을 갖고 상냥한 말로 차분하며 온화하게 지도하고 보살핀다. 

하지만 아이가 홀로 선다면 참여나 간섭을 삼간다. 

마지막으로 항상 아이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다.



정성, 최선, 기회 제공, 인내심, 보살핌.. 

이삿날 엄마의 잔소리를 반찬삼아 먹는 짜장면처럼, 내가 늘 바랬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받지 못한 모든 덕목들충분히 제공되야만 허구의 독립이 아닌 진짜 독립성이 길러지는 것이었다. 나는 방목적 양육수혜자였을까, 방치적 양육의 피해자였을까? 거의 20년 가까이 지켜온 견고한 정신승리의 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독립적인지 칭찬받을 때마다 엄마가 나를 방목해서 키운 덕분이라고 했다. 

쪼아 먹을 거라고는 돌부리 밖에 없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방치된 닭이었다는 걸 들키는 것보다는, 그건 방목이었다고 예쁘게 포장하는 것을 선택했다. 

포장과 자기 합리화로 타인의 동정으로부터 나의 작고 소중한 자존심을 지켜내었고, 그 상처를 통해 지금의 단단한 내가 되었다고 믿으며 자꾸만 무너지는 자존감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십계명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자기 합리화의 벽은 무너져 내려갔다. 

방목이 아니라 실은 방치받았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기 포장으로 살아온 세월이었음을 인정하고 나니, 독립적이란 말은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되었다.


부모가 되어 알게 된 사실, 아이를 방목하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돌보아주는 의존교육보다 백배쯤 더 어려운 일이란 것이었다.

아이가 두 살쯤 됐을 때 요리하는 내 옆에서 함께 칼질을 하고 싶어 했던 적이 있다. 작은 도마와 날카롭지 않은 칼을 준비해 주고 아이가 쪼물락 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아, 저게 써는 거니 아작을 내는 거니. 내가 대신해주고 싶다. 저 바닥에 떨어진 거까지 치우려면 일이 두 배로구나.' 따위였다. 몇 번이고 못 본 척을 하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아이의 서툰 과정과 비생산적인 결과물을 기다려 주는 때도 있었지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날에는 어김없이 끝까지 지켜봐 주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토양을 준비해 주고 기다리는 일은, 모든 것을 해주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분명했고, 기다릴 수 있는 여유, 믿어줄 수 있는 마음 또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방목계란이 그토록 비싼 이유는 설명이 되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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