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슬픔에 이름붙이기>를 읽고
슬픔에 이름을 붙이다니,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너무나 신박하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슬픔’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있는 수백 가지의 감정을 ‘슬프다’로 표현해오곤 했는데 때론 아쉬웠고 부족함을 느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감정을 표현하려고 다양한 감정의 언어를 섞어 풀어 말하곤 했다. 그래도 척하면 척 ! 하고 알아들을 만큼의 명확한 단어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꽤 많았다.
그런데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풀어줄, 나의 가려움을 긁어줄만한 책이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들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 것도 많았고, 그저 스쳐지나갔던 감정들을 곱씹는데도 의미가 있었다. 우선 저자의 작명 센스에 놀랐고, 크고 작은 감정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아 표현한 섬세함에 또 한 번 놀랐다. 내 경험을 비추어보기도 생각을 견주어보기도 하면서 단어 하나에 오랜 시간 동안 멈추어있기도 했다.
그렇게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던 단어들을 다시 한 번 적어보며, 오래도록 이 사전을 마음과 머릿속에 새겨보고자 한다.
아이들와일드(idlewild)
[형용사]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이를테면 공항의 게이트, 기차의 침대칸, 장거리 자동차 여행 중에 밴의 뒷좌석에서 몇 시간 동안 앉은 채 – 발이 묶이게 된 것에 고마워하는, 늘 무엇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일시적으로 덜어버리고 머리를 해방시켜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고작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는 일이라고 해도.
*어원: 뉴욕에 있는 케네디 국제공항의 원래이름인 아이들와일드 공항
이런 찰나의 감정을 포착해 단어로 만든 것에 놀랐다. 동시에 이런 안정감의 감정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다. 취업준비를 하며 시험을 위해 서울을 오갔을 때 기차와 버스 안에 발이 묶여있는 시간에 표현하기 어려운 안정감을 느꼈다. 이 이동 시간만큼은 비좁고 책을 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내가 잠깐은 안식을 취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위 단어의 해석처럼 내가 풍경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어도, 책을 덮고 잠시 눈을 붙여도 상황이 이렇기에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날 편안하게 했다. 상황 탓을 하며 타의적으로 쉼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에 잠시나마 행복했다. 이런 마음이 내가 나약해서일까, 의지가 없어서일까 라는 생각도 들곤 했었는데 모두가 느껴본 감정이라는 것에 참으로 위로가 되었다.
리버너(rivener)
[명사] 관계에 천천히 스미는- 상대가 예전보다 좀 덜 웃고, 돔 더 자주 눈길을 돌리고, 자신의 기분에 더는 신경 쓸 거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며 생겨나는 – 오싹한 거리감.
*어원: 중세 영어 riven(쪼개다; 가르다)
이 오묘하고도 서글퍼지는 감정을 느껴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오싹한 거리감’이라는 표현을 말이다. 누구보다 가깝고 따뜻했던 사람이 완벽한 타인처럼 느껴지는 그 마음은 참으로 쓸쓸하다. ‘러버너’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상대가 변한 것 같아” 라는 표현보다 “나는 요즘 리버너를 느끼고 있어”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 ‘러버너’에 담긴 의미를 모두가 안다면 이 마음을 풍부하게 표현하기에 더 용이할 듯하다.
단어를 짓는데 맥락이 담긴 게 이 사전의 매력이다. ‘riven’ 이라는 쪼개다, 가르다의 어원에서 확장된 ‘rivener’ 라는 단어. 어떤 이유에서 만들어진 단어인지 즉각적으로 이해되다보니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단어에 담긴 느낌과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곱씹을 수 있다. 모든 단어에 덧붙여 있는 어원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에테르라트(etterath)
[명사] 길고 고된 과정을 마침내 끝낸 후 – 학교를 졸업한 후, 수술을 받고 회복한 후, 자신의 결혼식을 마치고 귀가한 후 – 찾아오는 공허감.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삶에 임무를 부여해준 스트레스를 그리워하게 된다.
*어원: 노르웨이어 etter(다음) + ratne(부패)
나는 ‘에테르라트’를 만나고 너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공감되는 마음, 자주 느끼곤 했던 생각을 명확하게 짚어주는 단어를 만났기 때문이다. 대학교 졸업 후 공백 기간 동안 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사라진 느낌, 취업 이후 안정감과 동시에 찾아온 헛헛함, 이밖에도 인생에 큰 일 들을 마치고 느끼는 공허함은 적당한 스트레스를 그리워하게 했다. 이 미묘한 감정이 ‘에테르라트’였던 것이다.
이 에테르라트라는 모호하고 슬픈 느낌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어 안도감이 들었다. 나만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평온함,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느껴봤을 거라는 믿음이 이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임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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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감정에만 충실해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매일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일과에 따라 움직이는 내게 너무나 필요한 책이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를 통해 이런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았다. 모호하게 둥둥 떠다니는 마음들을 확실하게 붙잡아 정리한 느낌이 들어 책을 다 읽었을 때쯤은 평화롭고 행복했다. 한편의 일기를 정성스럽게 쓴 것처럼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또한 내가 느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의 단어를 마주하면, 반가움과 동시에 위로를 받기도 했다. 세상에 나만 혼자인 것 같은,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은 고독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느낌이었다. 어렵게 터놓은 나의 마음에 공감을 표할 때 위로받는 느낌이랄까? 정말이지 귀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