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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vil May 23. 2016

05#런던:하이 티[High Tea]를 아세요?

이 생소하고도 기억 속에서 잊혀버린 하이 티[High tea]


영화 ‚빌리 엘리엇‘에서 테이블에 둘러앉은 피곤에 물든 가족들의 소박한 저녁시간은, 내가 여행하면서 맛보았던 하이 티[High Tea]라는 티 타임[Tea Time]을 무색하게 할 만큼 위대하고 숭고하게 느껴진다.






12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다. 어둠을 뚫고 노스 일링 [Noth Ealing Station] 역 플랫폼을 밝히고 있는 것은, 오직 금세 꺼져버릴 것처럼 껌뻑거리는 누런 가로등의 불빛뿐이다. 오싹오싹 떨리게 하는 밤공기 속에서 힘겹게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 길게 뻗은 가로등의 그림자가 음울하게 느껴졌다. 삭막함을 넘어 으스스함이 살갓을 파고들었다.


친구와 그녀의 룸메이트의 남자 친구인 엘런이 마중 나와 있지 않았더라면, 플랫폼에서 한 발자국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허여 멀 거한 피부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파란 눈을 가진, 더군다나 운동이라고는 전혀 해 본 적 없어 보이는 덩치만 커다란 남자도 남자라고, 집까지 가는 동안 위험한 런던의 밤길이 조금은 안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기내에서 먹었던 식사가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으로, 엘런이란 친구가 손수 아일랜드식의 라자냐를 준비해 놓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조용한 일링[Ealing] 거리에 소 달구지가 요란스레 지나가는 것 같은 소음을 내며, 10여분 동안 세 친구는 그렇게 무거운 짐을 하나씩 끌며 지나갔다. 하지만 배고픔으로 밀려오는 피로감 때문인지, 사실 그 슈트케이스의 덜커덕거리는 바퀴 소리보다는, 엘런이란 친구의 아일랜드식 라자냐 레시피 강의가 나의 귓전에는 더 크게 느껴졌다. 아마도 엘런이란 친구는 덩치에 비해 굉장히 세심한 남자임이 분명한 듯하다.


Coffee or Tea?



- Coffee or Tea?

- 어~~..., 음.. 난 Tea.. 고마워~.


유리구슬처럼 파란 눈동자를 굴리며 느닷없이 물어보는 엘런의 등장에, 가방들만 대충 방안에 쌓아두고 주방으로 따라나섰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식사도 하기 전에 "커피" 또는 "티"라니...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지만, 그리고 그보다는 진한 커피 한잔이 간절했건만, 그 짧은 순간에도 나의 "커피"라는 발음을 이 아일리쉬 남자가 알아들을까 싶어 "티"라고 했는데, 식사 전 "커피" 나 "티"라니... 하지만 무엇이 먼저였건 간에, 긴 비행시간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지쳐버려, 무엇이든 입안으로 쑤셔 넣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티포트와 진한 라테가 담긴 머그잔, 하얀 접시 위에 붉은 토마토소스가 얹혀 있는 라쟈냐가 테이블 위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라는 향조차 맡는 것도 전혀  엄두를 못 내는 친구의 자리에도 커피가 머그잔 한 가득이다.


- 어! 너 커피 못 마시잖아.. 커피 마셔도 되는 거야?

- 아~~ 이거. 커피가 아니라 밀크티[Milk tea]라고 하는 거야. 너도 마셔봐. 굉장히 맛있어. 설탕은 원하는 만큼 넣으면 돼.

- 밀크티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티나, 실론티, 아일리쉬 티로 만드는 게 가장 맛이 좋아. 티를 뜨거운 물에 5분 정도 우려낸 후에, 5분 정도가 가장 좋아. 5분이 안되면 홍차 맛이 나지 않고, 5분이 넘어 버리면 홍차의 떨떠름한 맛이 나서, 가장 이상적인 맛을 맛보는 데는 5분이란 시간이 가장 좋지. 그런 후에 우유를 넣고, 설탕을 원하는 만큼 섞는 거야. 그러면 영국 전통의 밀크티가 완성되지.

- 음... 내가 엘런이 알려준 대로 밀크티를 만들어 봤는데, 도무지 엘런이 만든 밀크티 맛을 흉내 낼 수 가 없더라고. 그래서 난 엘런이 만들어준 밀크티만 마셔.


친구는 그렇게 나에게 밀크티[Milk tea]라는 것을 맛보게 해 주었고, 여자보다 더 세심한 엘런이란 친구는 자상하게도 밀크티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포트에 우려낸, 잎차로 만든 밀크티. 달콤했다. 부드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이 한잔을 즐기는 기분이 남달랐다. 밀크티 한 모금 마시고서 그렇게 세 친구는 편안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 영국에 도착한 첫날, 이렇게 근사한 하이 티[High tea]를 즐기다니. 정말 인상적이야!

- 하이 티[High tea]를 알아?

- 그럼 물론이지. 특히 '빌리 엘리엇'의 저녁 식사 장면은 절대 잊을 수 없지!


하이 티[High tea]를 알고 있다는 나의 말에, 테이블 위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힘차게 반짝거린 엘런의 눈빛이 생각이 난다.




London. 친구의 교수님이 초대한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


영국에서는 언제나 차를 마신다. 전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커피보다는 영국인들은 블랙 티[Black tea], 다시 말해 홍차를 즐긴다. 홍차의 문화가 곧 영국 문화이다. 한 사람의 영국인이 하루 평균 예닐곱 잔의 홍차를 마시는 "홍차의 나라"로, 하루에도 몇 번씩 티 타임[Tea time]을 갖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따뜻한 홍차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점심 식사 시간이 되기 전 브레이크 티 타임[Break tea time]을 갖고, 식사를 하면서도 빵과 함께 홍차를 마신다. 오후에는 쿠키와 스콘을 곁들여서 홍차를 마시고, 저녁 식사 후에도 애프터 디너 티 타임[Afer dinner tea time]으로 하루의 마무리를 한다. 얼 그레이[Earl grey] 홍차에 레몬을 넣어 마시기도 하며, 잉글리시 브랙퍼스트[English breakfast] 홍차에 우유를 넣어 밀크티로도 마신다. 감미로운 아이리쉬 브랙퍼스트[Irish breakfast] 홍차에 크림을 넣어 크림 티로도 마시는가 하면, 차가운 로열 블랜드[Royal blend] 홍차에 갖은 과일과 얼음을 넣은 아이스티를 마시기도 한다.


그런 영국 사람들에게는 매 시간이 티 타임[Tea time]이다. 영국 사람들에게 있어 티 타임[Tea time]이라는 단어 자체는, 바로 휴식 시간을 의미하며, 삶의 일부이다. 특히나 오후의 티 타임[Tea time]을 점심이나 저녁 식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영국인이 아닌 타지인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티 타임[Tea time], 하루에도 수차례 물을 끓여 차를 우려내고, 쿠키를 굽고, 케이크이나 스콘을 내오는 다소 번거로워 보이는 이 티 타임[Tea time]이 곧 그들의 소소한 일상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군수 용품만큼이나 많은 홍차를 전시 중에 소비한 영국인들로, 전시 중에서도 모든 병사들이 매일 티 타임[Tea time]을 가졌다고 하니, 영국인들의 홍차 사랑은 영국인이 아닌 이상 그들의 티 문화를 뼛속까지는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국의 티 타임[Tea time] 중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 말고도 하이 티[High tea]라는 오후 티 타임[Tae time]이 있다.


하이 티[High tea]. 이 생소하고도 기억 속에서 잊혀버린 하이 티[High tea]. 하이티[High tea]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슬프다.


High tea


힘든 노동의 시간이 끝나고 남편들이 돌아오는 저녁 6시 즈음. 찬 고기, 베이컨, 감자튀김, 구운 빵, 야채 스튜 등이 차려진 테이블 한 가운데에, 향과 맛이 진한 강한 차를 가득 채운 큰 다관을 놓고, 하루의 고단함과 무사함,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감사의 저녁 식사 시간이 시작된다. 가족 모두가 둘러앉은 저녁 식사 테이블. 소박하게 차려진 테이블 앞에 모두가 그렇게 조용히 두 손을 모아 하루의 안녕을 기도한 후, 곧이어 각자 앞에 놓인 찻 잔에 진한 홍차를 따른다. 홍차를 그 어떤 나라보다도 사랑한 영국 사람들이기에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는,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 계층 사람들이 즐기기에는 힘든 티 타임[Tae time]이었다. 전형적인 노동계층의 사람들은 직장에서 남편이 돌아오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저녁시간에야 겨우 차를 마실수 있었으니까.


광산이나 공장의 노동자가 힘든 노동의 시간이 끝나는 저녁시간, 주린 배와 마른 목으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원했던 저녁식사 인하이 티[High tea]. 이 시기의 노동계층 사람들에게 있어 홍차는 대체가 불가능한 음료였다. 시간관리가 엄격했던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에게 준비하기가 쉽고 간단한, 그리고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차, 더 나아가서는 굶주린 배를 채워주던 차가 바로 하이 티[High Tea]의 시작이다. 식사 메뉴 중 고기가 가장 귀한 역할을 하는 것에 비유해 "고기 차[Meat tea]", 혹은 "훌륭한 차[Great tea]"라고도 부른 하이 티[High tea]. 이렇게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된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를 즐기기 힘들었던이 시기의 노동계층이나, 중·하류층의 저녁 식사에서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 바로 하이 티[High tea]이다.



이 하이 티[High tea]를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만큼 즐기게 된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게 된 19세기 말에는, 노동계 층만의 식사가 아니라 모든 계층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변형한 하이 티[HightTea]를 즐겼다. 젊은 사람들은 승마나 크리켓, 낚시, 사냥, 요트 등의 여가 활동을 하면서 파티와 같은 의미의 하이 티[High tea]를 즐겼고, 여행자에게는 길가의 찻집[Tea room]에서 제공되는 하이 티[High tea]가 있었으며, 가정에서는 주로 주말에 고기 요리와 각종 샐러드, 다양한 케이크와 쿠키, 과일 등과 함께 하이 티[High tea]를 즐겼다. 일요일에는 하인들이 주인집의 저녁식사 준비를 걱정하지 않고 교회에 갈 수 있도록, 중·상류 층 사람들은 일요일에 하이 티[High tea]를 자주 즐겼다. 그리고 이 하이 티[High tea]를 즐기는 동안에는 계속 차가 제공되었다.


귀족과 평민의 티 타임[Tea time]을 구별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문화인 하이 티[High tea].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를 귀족들이 즐기던 티 타임[Tea time]이라면, 노동계층 사이에서 새롭게 등장한 티 타임[Tea time]이 바로 하이 티[High tea]인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하이 티[High tea]는 소박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현재는 그 구분을 따로 두지 않고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 로만 부르고 있고, 간혹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다 보면 하이 티[High tea]라는 이름을 저녁 식사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영화 ‚빌리 엘리엇‘에서 테이블에 둘러앉은 피곤에 물든 가족들의 소박한 저녁 시간은, 내가 여행하면서 맛보았던 하이 티[High tea]라는 티 타임[Tea time]을 무색하게 할 만큼, 위대하고 숭고하게만 느껴진다. 난 단 한 번도 제대로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나 하이 티[High tea]라는 티 타임[Tea time]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의 하이 티[High tea]는 그냥 오후 5시가 넘었을 즈음, 잠깐 들른 카페의 진한 향이 인상적인 홍차뿐이었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이 티[High tea]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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