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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pper Lee Jul 19. 2017

[리뷰]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독일문학, 고전

민음사<삶의 한가운데>


기나 긴 장마. 

비에 젖은 흙내음, 한껏 젖어 빛나는 길거리의 조명들, 현실의 풍경들을 지워버릴 듯이 쏟아지는 빗방울들.


마치 비오는 날 동동주와 파전이 생각나듯 자연스럽게, 이런 긴 장마에는 "독일 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책장에서 책을 고르던 중 마침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책 한권을 발견했다.  


책은 표지부터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한 여성'의 사진이었다. 헝크러진 머리, 얼굴 곳곳 깊게 패인 주름, 동공이 희미하게 보이는 옅은 눈동자.. 그리고 "이 눈빛", 

내가 오래토록 존경해온 한 교수님의 눈빛과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진정 눈빛에서 그 사람의 내밀한 심성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나도 그런 눈빛을 가지고 싶다고, 상대에게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눈빛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껴질 만큼 매력적인 눈빛을 가진 분이었는데 이 표지 속의 여성도 그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이지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삶의 거침과 비참함을 알면서도 결코 지치지 않는 생명력이 가득한 그런 눈빛이었다. 


작가 루이제 린저,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인 "니나"는 루이제 린저 그녀 자신이었다.  (실제 자서전은 아니다. 하지만 자적적 요소가 외현적으로 드러나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소설은 니나의 언니가 니나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니나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독자는 니나의 언니가 니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니나와 나눈 이야기, 니나를 사랑한 남자 슈타인의 편지를 통해 '니나'를 읽어간다.  


슈타인은 의사이자 대학교수이다. 그는 철저히 정돈된 삶을 사는 남자다. 환자를 돌보고 봉사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학문적 업적을 쌓고, 뛰어난 인품을 갖추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그의 인생에 '사랑'은 없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한평생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도 없다. '니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니나를 만나고 나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천성적 유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 철저한 자기 방어 속에서 살던 그는, 니나를 만난 후 절제할 수 없는 생의 불안정함을 느끼게 된다. 그의 삶은 니나의 바람에 한껏 휩쓸려 정처없이 흔들리고 만다. 대체 니나가 어떤 여성이기 때문일까? 


고양이, 말똥가리, 담비, 어린 학생들, 겨울 추위, 이 모두가 그를 쫓고 있어. 새는 이런 한가운데 살면서 새끼들을 키우고 있어. 한순간도 나뭇가지에서 마음놓고 앉아 있지 못하지. 그래, 새를 봐, 새가 어떻게 앉아 있는지를 봐. 달아날 준비를 하고, 경계를 하면서, 불안해 하면서 나뭇가지에 앉아있잖아. 그리고 온 세상이 그를 적으로 보는데 노래 부르는 거야. -p154.


그녀는 전쟁을 겪고 수많은 정치적 망명자를 비밀리에 도우며 반나치즘 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평생을 정부로부터 감시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끊임 없는 불안 속에서,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산다. 시대,사회적 탄압을 희롱이라도 하듯이, 외적 탄압이 결코 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빼앗을 수 없고, 아무리 큰 세상이라더라도 작은 한 개인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가치를 수호한다. 희생당하지 않을 자유를 위하여 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선택적으로 '포기'하더라도 말이다.

전체주의에 반대하여, 인간 개인의 존귀함을 몸소 증명하고 실천하는 그녀는 끝까지 그렇게 제 뜻대로 살고 만다.-산다는 표현 대신 '살고 만다'라고 쓸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그녀의 인생이 그저 살았다기엔 무척이나 처절하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온 세상이 그녀를 적으로 보는데 노래를 부른다.


불안했기에 정제된 삶을 살고자 했던 슈타인과, 불안하기에 삶의 민낯과 마주하여 싸웠던 니나. 그 둘은 너무나도 달랐고 그렇기에 그 둘의 만남은 '긴장' 그 자체 였다. 슈타인은 '시대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한 것처럼(p.356)' 살았고 니나로 인해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지만 그는 끝내 완고했다. 니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생조차 사랑조차 -정신과 생명력이 부여한 새로운 뉘앙스이며, 하나의 충격이며, 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며 - 일종의 실험이었던(p.319) 니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면서도 처절한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만나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문지방을 넘어서지 못한 거요. 문지방 너머 다른 사람의 왕국이 있는 그 곳으로 말이오. 당신은 나의 생을 인정할 수 없었소. 당신의 인생과는 너무 달랐던 거요.


그렇지만 당신은 나의 인생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잖아요?

니나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지 못했다. 니나는 여전히 당황한 눈빛이었으나 점차 깨닫고 있었다.-p.369


하지만 그 긴장 속에서조차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끝내 실패한 사랑이 아닌 '아름다운 만남을 선사한 인생에 감사하는' 사랑이었음을 이야기하며 끝맺는다. 슈타인의 사랑은 니나라는 한 여성에 대한 사랑을 너머, 색채 가득한 생을 마주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또다른 '자아에 대한 발견과 확신'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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