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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일당 Aug 04. 2021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 깨닫는 ‘신비’

오늘의 사소하고 근사한 대화

159일째 서른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오늘 옆 향수 코너에 일하는 금선씨와 내가 그랬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지 7개월, 인사한 지는 5개월쯤 된 금선씨는 나와 다른 게 참 많다. 그동안 5분씩, 10분씩 얘기한 바를 조각보처럼 꿰매어 보자면 이렇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싱겁게 먹었는데, 친구들 사이에선 라면 물을 한강 물만큼 받더라는 카더라 통신과 함께 라면 물을 맞출 수 있는 자유를 거의 영원히 박탈당했다. 금선씨는 간을 세게 하기로 소문난 직원 식당 밥이 그녀에겐 싱겁다 못해 맛이 안 나 숟가락을 내려놓게 될 정도로 유난히 짜게 먹는다. 그리고 그녀는 싫은 건 곧 죽어도 싫다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인데 반해 나는 숨이 꼴딱 꼴딱하더라도 싫은 소리를 못 한다. 나는 결혼주의, 그녀는 독신주의. 사뭇 진지해질 수 있는 종교나 신념에 관한 주제도 오늘 점심 순두부찌개를 먹었냐고 묻듯이 가볍게 나왔다. 지금껏 그녀와 소소하게 나누었던 대화 주제 중에 서로의 의견이 같았던 적이 한번이 없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나와는 너무나 다른 금선씨가 신기하고 재밌어서 보따리장수처럼 이 보따리 저 보따리 대화거리를 꺼내 풀어내곤 했다.

 오늘도 그녀와 여느 날과 같이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꼭꼭 숨겨놓은 생각과 고민이 낯선 이에게 아무렇지 않게 술술 잘 나오는 날. 오늘이 그랬다. 그녀라면 무심한 듯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는, 뿌리 없는 신뢰가 차올랐다. ‘오늘 금선씨에게 이런 고민을 말해야지!’ 작정하지 않았지만 세상에는 계획하지 않았을 때 더 근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대개 그런 일은 사소하고 평범하게 보인다. 분명 우리는 멍멍이상 연예인을 나열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농밀한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얘기하는 내내 그녀는 어떤 감정적인 동조도 없어 보였는데, 마스크로 가려서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눈을 보면 그랬다. 그녀는 중간중간 이해를 위한 꼭 필요한 질문 몇 개 빼고는, 추임새도 없이 그저 들었다. 내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미 스스로 결정을 다 내린 거 같은데...”

  뜨끔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생각을 한다고, 그 사람에게 말을 해요.”

 ‘나는 바로 그게 어렵다구요. 으앙왕’하고 속으로 말했지만 입 밖으로 다른 말이 나온다.

 “말하면 생각이 좀 줄겠네요”

 “생각이 준다기보다 나에게 주는 부담이 줄겠죠”


 방금 뚜껑을 딴 사이다만큼 시원하게 톡 쏘는 그녀의 말. 아니 어떻게 저런 대답이 버튼 누르면 나오게 만들어진 것처럼 바로 나올까? 머릿속으로 그녀의 대답을 꼭꼭 씹어 삼킨 다음 소화되기 전에 다시 되새김질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는 중 이어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그렇게 생각이 많으면 힘들 것 같아요.”

 정말로 그렇다. 힘들다. 그녀의 간결한 대답이 판사의 판결문처럼 힘 있게 다가온다. 꼬불꼬불했던 비포장 생각회로에 고속도로가 뚫린 것 같다. 이후로 우리 사이에 굵직굵직한 고민의 맥이 서너 개 흐르고 난 다음에 다시 아무렇지 않게 ‘역시 멍멍이상 연예인 중 나의 원 픽은 누구씨’라는 얘기로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오늘 그녀와의 대화를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신비’. 성도 모르는 그녀에게 고민을 말하고 그녀의 대답에 지혜를 배운다. 화살처럼 신비가 나를 관통한 것 같다. 무형의 화살이 어떤 재료로 만들었고 어디를 향해 관통했는지 영~ 감이 안 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인생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런 낯설면서 익숙한 신비로 채워지는 게 아닐까. 유레카, 그녀의 대답에 감탄하며 “적어놔야 해, 이건!” 하는 나를 보며 ‘뭐 저런 사람이 있지’ 표정으로 희한해하는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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