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일당 Aug 06. 2021

 이름표를 세탁기에 돌렸다

한 번쯤 실수해도 됐네?

160일째 서른

“아 이 바보!”

세탁기에 이름표를 돌렸다. 하지만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9kg 드럼 세탁기의 한가운데 난 동그랗고 투명한 문으로 이름표가 보이는지 좇는다. 웅- 웅- 세탁기가 세척 운동을 할 때마다 이름표가 이리저리 부딪쳐 요란스레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낸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누가 이름표 아니랄까봐 꼭 ‘나 여기 있어’ 하는 것 같다. 이름표는 네모난 플라스틱이고 앞면에 얇은 아크릴 소재를 밀어내면 내 이름이 인쇄된 종이가 있다. 뒷면에는 옷에 꽂을 수 있게 철로 된 옷핀이 붙어 있다. 이름표의 외침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할 때쯤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오른다. ‘종이에 인쇄된 내 이름이 번질까.’, ‘종이가 죽이 되어서 빨래를 망치면 어떡하지.’ 초조한 마음으로 이름표를 지켜본다.

 ‘너는 달에 몇 번도 안 하는 세탁을 실수하냐’ 걱정이 피우고 난 자리를 자책이 차지한다. 보통 이런 유의 사소한 사건 후에는 자책으로 돌림노래를 하다 자책으로 끝맺곤 했는데 그동안 성실히 먹은 세월 밥이 나를 갸륵히 여겨 알려준 걸까. 어느 새부턴가 자책한 후 추가된 단계가 있는데, 바로

‘그렇지만 잘했다고 나를 긍정해주는 것’. 그게 비록 티끌만 하더라도 집요하게 그 티끌만 한 잘한 부분을 찾아서 나를 칭찬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피드 워시 모드를 한 건 잘 했어. 스피드 워시 모드여서 세탁 시간이 짧았으니까’ 귀차니즘과 대충대충의 승리다. 요즘 세탁기에는 아기 옷, 찌든 때. 조용조용 모드 등과 같은 여러 선택지가 있지만 나는 한 가지 조작만 한다. ‘스피드 워시’! 속옷, 양말, 이불까지도 스피드 워시로 돌린다. 기계는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이 한 가지로만 쓰니 기계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기계는 유용하고 합리적인데 존재의 유일한 목적을 두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비합리적이고 유용하지 않은 구석이 있어도 되는 데서 인간만의 인간다움이 있다. 세탁기는 업무량을 스피드 워시로 소화하는데 보통 35분 정도 걸린다. ‘아차, 이름표’ 했을 때쯤 이미 세탁기는 반쯤 자기의 업무를 수행한 상태였다. 자기 긍정 단계를 마쳤는데도 여전히 이름표는 달달 돌아간다. 세상에서 제일 긴 17분이 지났다. 세탁을 마쳤다는 반가운 멜로디가 울린다. 다행히 이름표는 35분 사이 부서지거나 내 이름이 종이죽이 되지 않았다. 탁하고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너무 풀어진 나머지 입꼬리가 제멋대로 녹아서 위로 흐른다. ‘한 번쯤 실수해도 됐네?’ 행여 젖은 종이가 찢어질까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들어서 이름표를 집어 든다. 금은방 주인이 장갑을 끼고서 고가의 목걸이를 꺼내듯이 아크릴을 살살 밀어내고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햇볕 비치는 명당자리에 눕힌다. 또 부서지면 어떠랴! 비합리적이고 유용하지 않은 구석이 있는 내가 너그러이 너를 두 번, 세 번도 햇볕 아래 눕혀 주겠다.

작가의 이전글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 깨닫는 ‘신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