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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영 Jan 06. 2019

답 없는 질문을 품고 살아가기


언니가 떠나고 두 달이 지났다. ‘불행 앞에 선 인간은 결사적으로 묻는다’고 했던가. 예상치 못하게 언니를 잃고 그간 나도 결사적으로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대체 무엇이 언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언니여야 했는지. 알 것 같다가도 다시 생각하면 모르겠어서 묻고 또 물었다.


세상에는 인과관계가 명확한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훨씬 많다는 걸 알면서도 버텼다. 버티면 언젠가는 원하는 바를 쟁취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사람처럼 깊숙이 질문을 품고 다니다 틈이 날 때마다 꺼내어 들여다봤다.  ‘대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게 무엇인가’하고.





계속되는 생각에 제동을 걸어준 것은 얄궂게도 ‘왜 너이면 안 되는가’라는 반문이었다. 이 물음에 내가 명확하게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일렁이는 마음을 잠시나마 잠잠하게 해 주었고, 나는 이유를 찾아 사방을 헤매다 늘 이 지점에서 멈춰 자신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왜 불행은 나를 피해가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왜 언니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명확한 답을 얻고 싶다는 의욕을 한 풀 꺾이게 만들어 내 몸의 힘을 빼주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으므로 더 이상 집요하게 ‘왜?’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너에겐 답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그리고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질문이 우습게 느껴졌다. 당장 뉴스만 봐도 세상에 고통과 불행이 넘쳐나는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 나만은 그걸 피하겠다는 몸부림은, 왜 나에게 왔냐는 질문은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그럼 고통은 어디로 가야 하지?’, ‘글쎄 꼭 누군가에게 가야 하나?’, ‘아예 고통을 없애면 되지 않나?’, ‘없으면 되지 않느냐고? 왜 그게 없어야 하지? 없어야 하는 이유는?’


생각이 계속 뻗어 나갔다. 질문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어느 하나에도 정확히 대답할 수 없어서 그저 힘없이 웃는 순간이 많았다.


세상의 모든 일을 당위(當爲)로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게 가능할 리가. 꼭 그래야 해서 일어난 일은 세상에 없다. 내가 지금 이곳에 이렇게 태어난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로 존재하는데 죽음에 대해서만 반드시 이유를 알아내겠다? 어불성설이다. 삶을 구성하는 요소에 명확한 이유는 없다는 것, 중요한 것일수록 더 그렇다는 사실만 선명해질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고 박완서 선생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었다. 외아들을 잃고 절규하듯 써 내려간 글에서 선생은 ‘왜 내 아들인가?’라고 질문하다 ‘왜 내 아들이면 안 되는가?’로 바뀌면서 생각의 국면이 전환되었다고 한다. 88년에 아들을 잃고 수년 전에 돌아가신 그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걸 알고 놀라면서 이러한 생각이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겪는 패턴인가' 싶었지만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시 한 번 숨을 고른다. 그저 품고 가야 하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되 전부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어떤 아픔이 와도 그것이 내 존재와 삶을 장악하지 않도록 애쓰고 바랄 뿐. 나는 아직 답을 찾은 것도 질문을 멈춘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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