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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영 Aug 03. 2019

너는 내가 아닌데


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한 달 뒤 내 생일이 돌아왔다. 가족들과 짧은 생일 파티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려는 찰나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축하 카톡이 왔다. 우리는 미역국은 먹었는지, 생일은 잘 보냈는지와 같은 의례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가 그렇듯 할 말은 금세 동이 났고, 짧은 침묵 끝에 친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요즘 별일 없어?ㅋㅋ"


‘별일?? 별일이 없냐고?’


마음속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꼈다. ‘한 달 전에 전한 언니의 부음을 다시 한번 전하면 되는 건가? 그게 지금 나한테 가장 별일인데...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언니를 갑자기 떠나보내고 한 달 뒤에 맞은 생일. 차마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가족들과 간신히 초를 켜고 축하 인사를 나눈 뒤 방에 돌아와 혼자 누워 있는 심정이 어떨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건가.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려는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요즘 만나는 사람이 없냐’는 말을,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를 나눌 때 하던 질문을 지금 할 수 있는 거지? 미안한데 나는 지금 그런 게 안중에 없어.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노력하기 싫었다. 그간 수없이 해왔으니까. 한 달 전에도 그랬으니까.이번 만은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것까지 할 여력이 없었다.


“응 별일 없어. 나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해서 이제 자려고.  잔다~ 잘 자!”


황급히 대화를 끝내고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친구의 악의 없는 무심함에 대해 생각하자 너무 많은 일화가 떠올랐다. 달라서 그런 거라고, 나의 어떤 점 때문에 친구도 나 같을 때가 있을 거라고 여기며 서운해하지 않으려던 순간도 생각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이다 싶었다. ‘아, 네가 지금 미국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2003년에 방영한 드라마 <완전한 사랑>을 본 것도 이쯤이다. 김수현 작가가 쓴 <완전한 사랑>은 과외 선생과 제자로 만난 영애(김희애)와 시우(차인표)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여 10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드라마 중반부 즈음, 희귀병에 걸려 곧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영애(김희애)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절망한다. 평소와 달리 행동하고, 10년 동안 자신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모멸감을 준 시댁 식구들의 부당한 처사에 더 이상 굽히지 않는다.


명절을 맞아 시댁을 찾은 영애에게 제사에 참여하지 않기를 강요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라는 시부모. 자신을 또 한 번 멸시하는 시부모에게 영애는 "그냥 돌아가겠다”며 “더 이상 없는 사람처럼 숨어 있지 않겠다”고 응수한다.


영애 없이 제사를 치르고 집에 돌아온 남편 시우는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왜 그러냐"며 “이전에는 집 안에도 못 들어오게 했지만 이제는 집에 들어오지 않느냐”며 영애를 타이르고, 영애는 아무리 사랑해도 서로가 같을 수 없음을 느끼면서 이렇게 절규한다.



“별 수없는 박씨네 자손이구나. 입으로는 피를 토하겠다더니 어느새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어.


그래 어떻게 나만큼 끔찍하겠니?

어떻게 나만큼 분하겠니? 어떻게 나만큼 참혹하겠어.

어떻게 나만큼 치가 떨리겠어. 너는 내가 아닌데”





타인을 공감하는 일에 실패할 때마다 영애의 말을 생각한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이 새삼 뚜렷하게 인식되는 건 완벽한 공감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고유한 존재인 만큼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고유해서 완벽히 공유할 수 없다는 걸, 그게 인간의 기본 조건이라는 걸 자주 느끼기 때문일 테다.


영애의 대사를 떠올릴 때마다 타인에게도 나에게도 관대해진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펴낸 신형철의 말처럼 우리는 부단히 공부해야만 타인의 슬픔을 겨우 알 수 있고,아무리 공부해도 ‘겨우’ 밖에 알 수 없어서 슬픔을 공부하는 일은 언제나 슬픈 일이다. 지난 겨울을 통과하면서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며칠 전, 추석을 맞아 친구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연휴라 출근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연락했다’며 ‘바쁘면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거듭 강조하는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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