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O씨와 인터뷰하고 <채널예스>에 실린 기사를 다시 읽어보면서 후회했다. 해야 할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걸 묻지 않았을까.
할머니, 엄마, 아빠, 반려견과의 이별 이야기를 꺼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1년 반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짐작했던 것보다 짧은 기간에 놀랐고, 예상치 못한 눈물에 당황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눈물이 날 만한 일이지만, 도도할 것만 같은 세련된 모델이 그렇게 쉽게 무장해제되어 눈물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슬픔을 다루는 일에 단련되어서 이런 인터뷰에서 이야기하는 것쯤이야 어려워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인터뷰가 이별 이야기에 치중될까 봐 염려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1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할머니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반려견마저 떠났는지 물었다면? 혼자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질문하는 상상을 하다 4년여 전 글쓰기 수업에서 읽은 은유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말하고 싶을지, 하기 싫을지 모르지만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조차도 알 수 없겠지요
‘묻지 못한 이야기’라는 내 글에 대한 답이었다. 마음에 깊이 남았고 처음 본 이후 지금까지 자주 떠오르는 말이다. 상대를 위해서 묻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답을 듣기 두렵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는 걸 이때 깨달았다. ‘묻지 못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끝내 묻지 않았고, 이제 물을 수 없게 됐다.
인터뷰이에게 1년 반 사이에 자신의 할머니와 부모, 반려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사이에서 자신은 어땠는지 물었다면 어떤 답을 들었을까. 인터뷰이는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하고 싶어 하니까. 물었다면 어떤 쪽이든 답을 들었을 것이다. 답은 질문하는 사람만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