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념녀였다니
밥 한 번 먹자던 선배가 집 근처로 찾아왔다. 딱히 갈 곳도 없고 배도 고프지 않아 밥 대신 감자튀김에 맥주를 마시고 근처 공원을 걸었다.
“눈치챘겠지만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선배가 말을 꺼냈다. 어떤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아서 턱까지 내려 놓은 마스크를 눈 밑으로 끌어올렸다. 어둠 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 어느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마주치던 날 이후로 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자신이 이야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이야기할 때는 이상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고. 그래서 나는 네가 좋다는 이야기였다. 이어 그는 본인이 얼마나 사람 보는 눈이 있는지를 강조하며 나를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뭔가 다르다고, 명품백 이런 것도 안 좋아할 것 같다고.
‘아…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유명한 개념녀인가’. 마스크 안으로 얕은 한 숨이 나왔다. 식은 커피 같은 상태로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웃으며 답했다.
“저 안 달라요. 아주 평범하고 다른 사람하고 비슷해요. 그리고 저 명품가방 좋아하는데요? 돈이 없어서 (안)못 살뿐이지…”
명품백에 관심이 없을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나 절반만 맞았다. 실제로 나는 명품 가방에 큰 관심이 없지만 그건 내가 명품 가방을 살 만큼의 경제력이 없어서고, 무리해서 살 만큼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할 뿐 그 이상의 함의는 없다. 더군다나 명품 가방을 사고 말고는 내 문제이지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
혹시 나를 보고 남자에게 명품 가방 받는 일을 당연하게 여겨 남자의 경제력을 위협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개념녀'를 찾았다고 좋아했다면 이 사실도 알아주기를. 개념녀의 개념에는 남자에게 명품 가방 받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만큼, 남자 혹은 여자라고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일을 경계한다는 태도도 포함된다는 것을.
진심은 말 뿐 아니라 표정, 제스처, 눈빛 등으로도 전해지는 것이어서 나는 그가 어렵게 여기까지 왔음을,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확히 그 지점에서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과 쓸쓸함을 느꼈다.
'넌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는 말은 ‘다른 여자’로 통칭되는 대부분의 여성들을 부정한다. ‘다르다'는 평가에 나를 가두고 그것으로 손쉽게 관계의 우위를 점한다. 졸지에 평가를 받고 이른바 ‘개념녀’로 라벨링 된 나는 그의 기대를 충족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고 ‘다른 여자’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애쓰게 되는 것이다.
어렵게 꺼낸 진심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끝내 열리지 않았던 건 그의 평가와 칭찬은 결국 ‘넌 내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했어’라는 자기 과시의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명품백 같은 것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라는 친절한 예시와 함께 들려준.
그의 개념과 나의 개념은 왜 다른 걸까. 선배에게 나의 또 다른 ‘개념’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이 부는, 쓸쓸한 초여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