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예쁜 것이 좋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내겐 특히 사랑과 더불어 삶의 가치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 허나, 우습게도 단어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나와는 무척 맞지 않는 단어. 옷을 고르는 센스도, 물건을 사거나 꾸미는 센스도, 그렇다고 사용하는 언어도 그렇지 않다. 내 주변에서 내가 고른 것 중 아름다운 건 없어 보인다. 그런 내게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삶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맞는 걸까.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이것이 세상에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내가 정말로 그런 것들을 기준으로 어떤 선택들을 이어왔는가? 아, 모르겠다.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이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내게 있지도 않은 아름다움이란 가치로 세상에 무엇을 실현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조차 잡지 못해서. 가치라는 것은 삶의 가이드라인, 울타리, 선택의 경계선이라는데, 대체 이 단어는 어쩌다 내가 가당치도 않게 욕심내게 되었을까. 연말이 된 지금, 내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기에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이 가치를 지워버리고 다른 것을 선택할까. 펜을 들었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포기할 수가 없어. 아름다움은 내게 무척이나 중요한걸.
나는 내가 그러지 못했기에 늘 아름다운 것에 이끌리며 살아왔다. 어릴 때 두 눈에 박힌 밤하늘 별들의 이야기. 금빛으로 빛나지만 실은 외로워 보이는 달의 크레바스. 짙은 새벽 공기, 해가 떠오르는 모습, 아름다운 시, 작은 풀벌레의 목소리, 쉬고 있는 나비, 오동통한 꿀벌, 고요한 윤슬, 남편의 웃는 얼굴, 험한 길에서 살아가는 고양이, 잎이 하나만 남은 단풍나무, 계절을 담은 바람, 용기를 내는 강한 마음, 노력했지만 좌절 앞에서 흘리는 눈물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
대체 이 아름다움이 뭐길래 나를 이토록 욕심쟁이로 만드나. 단 한 번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것은 무엇일지 찾아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 나는 내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정의하고자 하는가.
신기하게도 한 가지 고민에 몰두하고 있으면 해답은 불현듯 찾아온다. 석보상절에서 말한 아름답다는 [아답다; 나답다]라고 했다.
나는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본질, 자기다움, 꾸미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자본의 아름다움으로 착각하고 있었나. 내가 갈등했던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이 ‘내가 아름답다 생각한 것들이 그 기준에 맞는가.’라고 판단하고 평가했기 때문이었구나.
내게 중요한 것은 자본의 기준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정의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소중하고 작고, 연약하고, 유한하기에 애처롭고 안타깝지만 그 자체의 고유함이 내게 주는 숭고함.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니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고양이답게 늘어져 졸고 있는 우리 집 고양이 김쿠우씨. 온화한 모습 그대로 활짝 웃고 있는 남편. 그리고 겨울답게 차가운 창 밖의 빗방울. 좋아 보이기 위해서 꾸미려 하고 애쓰며 덧씌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덜어내고 덜어내서 나 자신의 본질을 꺼내놓고, 온전한 자기 다움으로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으로 와닿게 만드는 것이 더 “아름다움 “에 가까워 보인다.
이미 자연의 많은 것들은 지극히 나다운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왜곡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만이 두 눈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에 가까워지려고 “나”를 잃어간다.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들여다보고 발견하고 닦아내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다듬어진 ‘나’ 다움, ‘아름다움’은 어느 한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가슴에 자리를 잡고 힘든 시기에 나를 구원해 주는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