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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Apr 16. 2018

서른셋, 아직 싱글이라 행복하다

가마쿠라에 천천히 도착하다




 아침 여섯 시.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기사님이 여행 행선지를 묻는다. 가마쿠라라고 하시니 낯설어하신다. 도쿄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작은 도시라고 말씀드렸다. 자제분이 히로시마에서 일하신다고 하시며 일본이라는 사실에 반가워하신다. 히로시마와 도쿄, 가마쿠라까지는 꽤 먼 거리일 텐데 한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토록 반가우신가 보다. 한참 동안 이어진 자제분의 자랑에 지친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대뜸 누구랑 가냐고 물으신다. 친구와 둘이 떠나는데 임신 5개월 차라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씀드렸다. 기사님이 다시 묻는다.


 "손님은 결혼했는교?"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순간 기사님의 설교가 이어졌다. 척 봐도 서른이 넘은 것 같은데 결혼을 왜 하지 않느냐, 그것이 부모에게 얼마나 불효인지, 노산이 되면 얼마나 위험한지, 여행을 갈 때가 아니라는 둥, 소위 이 나라에서 30대 중반을 넘어가면 결혼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마저 나의 결혼과 노산을 걱정하니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올해 서른셋인 내가 지금 싱글인 것이 이토록 문제인 것일까?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 28년 지기 은정이가 에스컬레이터에서 작은 캐리어를 끌고 올라온다. 이전에 비해 부른 배가 눈에 띈다. 그녀의 뱃속에 새 생명이 자란지도 어느덧 5개월이란다. 어린 시절을 같이 자라오고, 거침없이 이십 대를 함께 해 온 친구들의 부케를 받고, 조카들의 탄생 소식을 듣고 있노라면 가끔 나도 저 대열에 들어서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이 생긴다. 은정이처럼 결혼한 친구들은 벌써 아이를 낳아 자녀를 키우는 결혼 후의 순차적인 삶을 착실히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게도 다들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지 결혼 생활에서 나올 법한 하소연을 들은 적은 없다. 되려 그녀들은 나에게 결혼을 권한다. 그중 수많은 이유가 조금 전 택시 기사님이 언급했던, 노산은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다. 글쎄다. 아직 결혼을 예정하지도 않은 나에게 아이는 낯설고 생소한 이국의 단어처럼 느껴진다.




 나리타 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정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메스꺼운지 토하고 나서야 조금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임신 5개월 차가 어떤 몸인지 알 리 없는 우리 여행이 무모한 것만 같아 걱정이 됐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괜찮다는 말을 연신해댔다. 관리를 잘 해서인지 정말로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미래의 일을 알 수가 없어 적게 오래 보고 오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약 2년 전, 은정이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은정이는 더 늦게 결혼할 거라는 믿음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도 모른 채 맹신하고만 있던 내가 우습지만,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고, 또 둘째 아이를 낳고, 그렇게 아이를 키워가다 어느덧 내 부모님과 같은 나이가 되는 삶이 어쩌면 모두가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면 의구심이 든다. 당연하다는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하는 것일까? 나는 동의한 적이 없는데, 암묵적으로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따라야 하는 것이 옳은 걸까?


 물론 나는 비혼 주의자도 아니고 노 키즈 족도 아니다. 언제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결혼을 하고, 결혼 후에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에게 우리가 후대를 이어나가 전해주고 싶은 것들을 지켜가게 하고, 그 아이가 자라 자신의 뜻과 재능을 펼치는 것도 보고 싶다. 그러나 당장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삶에서 큰 일이라고 하면 큰 일이라고 볼 수 있는 결혼과 양육에 대한 성찰이 한참 부족한 내가 주변의 뜻에 떠밀려 결정할 필요가 있을까.

 다행이게도 은정이는 결혼을 강요하지도 권하지도 않는다. 내가 결혼을 하고 싶다면 하면 되고 굳이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뿐이다. 누군가가 권해서 떠밀린 결혼보다 내가 결정한 결혼이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고 고민이 든다면 굳이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한다. 성공적이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셨던 어머니마저도 결혼은 안 해도 되지만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하신 것처럼.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후, 우리는 운 좋게도 대기 없이 오후나 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하네다행이 없는 부산에서 가마쿠라로 가는 길은 조금 멀다. 비행이 끝나자마자 열차에 탑승해야 하고, 오후나에서 내려 모노레일이나 전차로 또 갈아타야 한다. 창 너머의 하늘은 깊은 잿빛이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날이 좋아도, 좋지 않아도 마냥 좋기만 한 가마쿠라였지만,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에게 내가 사랑하는 비밀 장소를 소개하고 싶어서 일까, 조금은 날씨가 맑았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 아쉬웠다.

 



 가마쿠라는 그렇다. 조용하고 곳곳에 여백이 넘친다. 오밀조밀한 건물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하늘의 여백이 크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 고개를 크게 젖히지 않아도 하늘이 차지하는 폭이 넓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고 예쁜 집에는 과연 누가 살고 있을까. 나는 평화롭고 정겨운 마을에 시야를 빼앗겼다. 집집마다 작은 화단과 화분이 있고, 아이들이 탈 것 같은 작은 자전거가 귀가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공상에 사로잡힌다. 조금 일찍 누군가를 만나 결혼했으면 '나도 이런 집에서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무렵, 일본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스탭은 이전과 달리 바뀌었지만, 고향집에 돌아온 느낌은 늘 같다. 다다미방은 고즈넉하고, 나무로 된 테라스는 옛 다락방을 연상케 한다. 넓진 않지만 내 몸 하나 의탁하기엔 충분한 이곳은 그야말로 '적당하다'라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법하다.



 뭐 결혼이 나쁘기만 하겠나. 단지 선택을 너무 강요하는 것이 간섭으로 느껴질 뿐이지.

 툇마루에 앉아서 평화로운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에 나왔던 한 노부부의 삶처럼, 작은 툇마루에 두 손을 잡고 앉아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잔잔한 종소리를 들으며 늙어가는 모습. 그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살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봐주면 안 되는 걸까. 급하지 않아도 괜찮고, 건너뛰어도 괜찮을 과정 말이다.


 세상은 정해진 순서와 시기가 있다고들 한다. 공부에도 시기가 있고, 연애에도, 결혼에도, 그리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마저도. 물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순간까지 생의 흐름이 있어 그 신체에 걸맞은 행동들은 시기와 순서를 정해야 하는 것이 맞을 거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것들이 왜 '시기'가 있는가.


 다들 혼자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사는 내가 안쓰러워 보이나 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노파심과는 달리 지금 내가 싱글이기 때문에 충분히 행복하다. 건강에 좀 더 투자한 덕에 몸은 20대보다 더 튼튼해졌고, 제약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아무 간섭 없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깨닫고 왔다. 때때론 잔소리 없이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 드러누워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제약 없이 배우며 홀로 사색할 수 있다. 혼자라고 해서 단 한 번도 외로운 적이 없다. 어차피 나도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야 한다면 지금 내 친구들의 길과 별반 다르지 않게 걸을 것이다. 결국은 삶의 과정으로 거치게 될 거라면 지금이나 나이가 들어서나 크게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남들과 비교하며 조급함에 쫓겨서 한 결혼이 무슨 행복을 가져다 줄까. 스쳐 지나가는 과정으로 보기엔 결혼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 거라면 좀 더 신중해져도 되지 않을까. 누군가에 대해 내 마음에 확신이 생겼을 때, 그가 여태 살아온 삶과 내가 살아온 삶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갈 자신이 생겼을 때, 그때 결정하고 싶다.

 오늘 우리가 도착한 가마쿠라처럼 급하지 않게, 천천히 말이다.

 


[일정] 1일차

부산 - 나리타(나리타 익스프레스) - 오후나(모노레일) - 쇼난 후쿠사와 (도보) - 가마쿠라 게스트 하우스

코마치도리-쓰루가오카하치만구


[숙소] 가마쿠라게스트하우스

http://www.kamakura-guesthouse.com/

 273-3 Tokiwa, Kamakura-shi, Kanagawa-ken 248-0022

Dormitory 3500¥/per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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