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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TV 방송 역사의 산증인, 언론계 거장 김영호

by 끌로이

한국 TV 방송 역사의 산증인, 언론계 거장 김영호


“방송은 내 생명이죠. 감사하게도 이렇게 건강한 음성을 타고났으니 아끼지 않고 충분히 쓰다 가야죠.” 수화기 너머 선생의 목소리는 30대 청년의 카랑함 그대로였다. 목울대에서 나오는 어휘마다 정확하고, 음가 하나하나 묵직한 힘이 실렸다. 모든 문장에는 친절이 밑간처럼 배어있었다. 행간의 앞뒤로는 오직 주어가 지닌 겸손함이 튼튼하게 자리를 지킨다. 그런 어른이 사실은 88세 거인이다. 68년째 마이크를 쥐고 우리를 웃고 울린 전설의 방송인 김영호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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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노아의 대홍수를 겪은 후에 인간의 평균수명은 120세 전후다. 그러나 단순히 오래오래 천수를 누리는 것이 어찌 복이랴. 바위처럼 생명 없이 매달린 채 무의미한 매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생명의 힘을 느끼며 사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꿈이 아닐까. 백세 시대를 맞은 요즘, 매일 조금씩 사그라지는 노인이 아닌 위엄 있는 자세로 삶을 즐기는 노인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더 젊고, 더 총기 있고, 더 밝다. 김영호 선생은 오랜 방송 경력이 증명하듯 방송을 사랑한 원로 언론인이다.


“1953년에 한국기독교방송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죠. 55년에는 KBS로 옮겼는데, 그때는 이름이 HLKA, 서울중앙방송국이었어요. 이제는 회사 연보를 뒤져야 나오는 이름들이지요. 아나운서를 꿈꾸고 입사한건 아니었어요. 고학생이 급히 일자리를 찾다보니 우연히 방송국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게 천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KBS 개국 방송 함께해

1961년 12월 31일 오후 9시. 그의 목소리를 통해 KBS TV방송의 첫 시작을 알렸다. 라디오 전파만 타던 서울중앙방송국이 KBS 한국방송으로 이름을 바꿔 본격적인 TV시대를 연 시발점이다. 이후 88 서울올림픽 프로그램 제작과 '11시에 만납시다 김영호입니다' 쇼 프로그램 사회자로 활동했다. 한국에 아나운서라는 직업 타이틀을 거의 최초로 차지한 선생이 어쩌다 지금 뉴욕에 있는 걸까?


선생은 1966년 6월 10일이었다고 날짜까지 또렷하게 기억했다. 미 국무부가 운영하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국에 파견된 시점이다. 당시는 KBS가 VOA 한국어 방송을 중파로 재송출했던 시절이었다. 3년 한시적 계약이었다. 공부도 하고, 미국 선진 방송 시스템도 익힐 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간을 채우자 VOA에서 3년을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재계약 사인을 한 것이 오늘날 김영호 선생의 55년 이민사 단초가 됐다.


이제 갓 TV방송 시대를 연 한국의 병아리 아나운서 눈에 비친 미국 방송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찔한 충격이었죠. KBS 개국할 때만 해도 해외에서 들여온 카메라가 한대 밖에 없었어요. 하루 4시간 정규방송이 고작이었죠. 녹화기가 없어서 모든 프로그램은 생방송으로 제작했어요. 드라마가 가관이었죠. 생방송으로 송출하는 드라마, 상상해 본 적 있어요? NG는 곧 방송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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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1호 한국말 방송국 세워

반면 미국은 보다 안정적이었다. 자유로운 방송 분위기와 첨단 장비, 잘 짜인 방송 체계가 매력적이었다. 이 시스템을 그대로 한국 방송에 접목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미국에 한국말 방송국을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사람 손으로 만들고, 한국 사람이 출연하며, 한국말로만 방송하는 미국 최초의 방송국, 워싱턴기독교방송국이다. 물론 만들기만 한다고 저절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24시간 운영을 하려니 인력과 자본이 필요했다. 지역 어른들과 교구가 십시일반 힘을 모았다.


힘은 이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워싱턴을 시작으로 뉴욕, 애틀랜타, 시카고 등 미주 지역 6개 도시에 기독교 방송국을 세웠다. 아내와 세 자녀는 모두 워싱턴디시에 남겨둔 채 홀로 동분서주하며 벌일 인이다. 방송국 하나를 세우는데 보통 2년이 걸린다고 한다. 선생은 2년 동안 중요 인사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손수 주춧돌을 놓는 순간부터 첫 방송이 전파를 타는 순간까지 생생하게 지켜봤다.


“기독교 신자라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전문 방송인으로서 제가 가진 재능을 어떻게 이롭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방송국 설립에 매진했습니다.”


기독교 방송국이라 해서 반드시 종교적 의미만 지니지는 않는다. 미국 땅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의 목소리를 결집하고, 고단한 이민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안식처 역할을 교회가 했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반가운 우리말 방송은 이민자들에게 내일을 즐겁게 살게 하는 낙이 됐다.



후세대 위해 동포 언론 발전 이끌어

미국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려면 흔히 동포 언론이 제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과 미국 사이 메신저로서 동포사회의 동향과 각 분야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동포들의 시야를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분야로 확장시키는 연결축이 돼야 한다는 의미이다. 김영호 선생은 일찌감치 동포 언론 발전에 주목했다. 한인 2세, 3세들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선생 세대가 길을 잘 닦아놓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세운 기독교 방송국이 동포 사회의 화합과 발전의 중심축이 되기를 희망했다.


현역 방송인으로 활발하게 활동

한 세기 가까이를 살아 온 원로 방송인의 큰 산맥 김영호 선생. 88세의 '현역' 방송인은 매일이 바쁘다. 미주기독교방송국(KCBN) 라디오에서 특별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K-RADIO 중요 인사 인터뷰를 담당한다. CTS 기독교 방송 채널에 출연하기도 한다. 고정 출연하던 방송들을 최근 들어 조금 줄였을 뿐 선생의 생방송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다 지난해 11월 말까지 뉴욕장로연합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대뉴욕지구 한인교회협의회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일과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병행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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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걷기, 잠, 뉴스'가 내 활기의 비법

방송인에게 최고 무기인 음성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해 선생은 지독하게 몸을 관리한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하루 8시간씩 푹 자려고 노력한다. 안되면 7시간이라도 잔다. 아침 6시 반에 눈을 뜨면 일주일에 세 번은 수영장에서 걷기 운동을 한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집 앞 공원을 한 바퀴 걷는다. 오랜 시간 선생이 고집처럼 지켜온 생활 습관이다. 야속하게도 세월이 지나 몸은 자연스럽게 늙어가지만 머리와 생각만큼은 늘 푸릇하게 환기한다. 매일 신문, 뉴스를 탐독한다. 타고난 건강체질도 한몫 하겠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하기에 68년 방송 인생이 설명된다.


“저염 한식 위주로 먹고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아요. 제 건강의 비결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저는 최대한 그 속도를 늦추면서 깨끗하고 건강하게 늙고 싶습니다. 제 생명과도 같은 방송을 계속 하려면 그래야 해요.”


선생이 전성기때 활동하던 방송 환경과 현재는 많이 다르다. 우선 언론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그렇다. 아나운서를 앵무새가 부르고, 기자들이 기레기로 전락한 현 세태에 대해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선생은 한참동안 긴 숨을 내쉬면서 슬프고도 씁쓸하다고 개탄했다. 방송인의 발자취는 결국 시간이 지나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라면서 '기본'을 거듭 강조했다.



결국은 '인성'이더라. 선한 사람이 성공해

좌든 우든 쏠리지 않는 뚝심, 알권리를 우선 생각하는 정의감, 본질을 꿰뚫는 혜안, 아무 색도 입지 않은 투명함이 바로 선생이 말한 기본이다. 그중에 제일은 인성이다. 김영호 선생은 쓰레기 기자라는 뜻의 기레기도 결국 인성이 엉망이기 때문에 생긴 멸칭이라고 말한다. 특히 현장에서는 관계 맺는 게 일의 거의 전부인데, 인성이 탄탄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유능하고 열정 많은 기자라 해도 오래 일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제 개인의 삶이 화려하다면 화려할 수도 있겠지만 큰 부를 축적한 삶은 아니었어요. 방송국 운영이 보통일은 아니거든요. 아내는 시집 잘못 왔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후회 없어요. 중심을 바로 잡고 올곧게 산 언론인이라고 자부합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바르고 정확한 언론인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어요.”


88세 언론계 거인이 후배들에게 남긴 말에 뼈가 있다. 세상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가 만나는 지점을 섬세하게 짚어온 현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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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원로 언론인

1932년생. 경복중·고등학교, 연세대 문과대학 학사, UCLA 방송학 석사 등의 과정을 거쳐 워싱턴 캐피털 바이블 신학교, cbs 신학석사를 졸업했다. KBS 아나운서 실장, 88올림픽 방송 제작 감독 등을 역임하고 대표 프로그램인 ‘11시에 만납시다’를 6년 동안 진행했다.

1971년, 미국 최초로 우리말 방송을 시작한 ‘워싱턴 기독교 방송국’을 비롯해 뉴욕 기독교방송(KCBN)까지 미주 6개 기독교 방송국 설립을 주도했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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