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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y 22. 2024

아메리칸 서울



 


'엄친딸'과 똑 떨어지는 영어 단어가 있을까. 말 그대로는 엄마 친구 아들, 숨겨진 뜻은 예쁘고 잘생기고 머리 좋고 돈도 많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부러움의 대상을 가리킨다. 어쩌면 한국에만 존재하는 고유 명사인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태어나 우간다를 거쳐 미국에서 자라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된 헬레나는 엄친딸이다. 헬레나는 이 단어의 또 다른 뉘앙스를 안다. 친구들은 물론 형제들조차 싫어하는 아이. 헬레나는 어려서부터 똑똑했고 네 자매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됐다. 한편으로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헬레나의 회고록인 <아메리칸 서울>의 부제는 '미국에서 한국인 여성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뿌리는 한국인이었지만 그는 철저히 자신의 배경을 부정하며 성장한다. 우간다에서부터 영어를 익히는 게 우선이었기에 그는 모국어를 외면했다. 미국에 넘어와서는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못한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모순인 점은 지독히 힘든 시절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한국 드라마였다.    


백인 남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존스 홉킨스,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 피츠버그 어린이병원 등에서 진료하며 탄탄한 커리어를 구축해 갔다. 그러다 마흔이 되던 해 돌연 일을 그만둔다. 시작은 교통사고였지만, 만 개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상당한 부상이었지만 직장을 그만둘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의사가 되기 위해 무수히 노력한 지난날을 생각하면 사직은 다소 충동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교통사고는 사직을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을 뿐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었다.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 우울증을 앓는 엄마의 자살 시도, 어린 시절에 당한 성폭행 등 여러 생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일에 대한 회의감과 여러 인간적 아픔이 짙은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대학에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한다. 


책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면면이 담겼다. 미국 이민 이후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 소송을 비롯해 의사로서 경험한 일, 자매들과의 불화, 힘겨웠다는 말로 부족한 지난한 이혼 과정, 뒤늦게 그 상처를 마주한 어린 시절의 일 등을 고루 담아냈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한국을 떠난 부모를 비롯해 가부장제 시대의 질곡 역시 어른거린다. 


특히 본인 역시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부정한 부분이 가슴 아프다. 동양인 이민자로 생존하기 만만치 않은 환경 탓에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동양인 여성 의사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을 고백한 부분도 인상 깊다.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되어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랐고, 전문의가 되어서는 동양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불평등을 감수하며 지냈다.  


어머니와 같이 보던 한국 드라마 속 남자들은 임신한 애인을 무책임하게 버렸다가 몇 년 후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만 하지 않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 내게 한국인이라는 의미는 평생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불운의 의미였고, 여자라면 특히 더 그랬다. - p. 32 


글쓰기는 허리통증을 완화하는 물리치료처럼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줬다. 헬레나는 끔찍한 일을 겪으면 더 단단해지고, 그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상처를 어렵게 회복하며 뒤늦게나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수없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일어서야 했던 이방인의 삶과 그 이후의 빛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메리칸 서울>은 한국계 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이다. 한국어 역자가 별도로 있을 정도로 헬레나는 한국어에 익숙지 않다. 첫 페이지를 열 때는 이 사실이 의아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는 으레 수긍이 갔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행운이 따라야 할 시점에 불운이, 그러다 불운만 계속되나 했던 차엔 행운도 따랐음이 느껴져 마치 한 편의 성장일기를 본 듯하다. 미국에 사는 한인 여성이 평생 겪어야 했던 문화충돌과 소외감, 혼란이 남긴 상처들을 날것으로 기록해 더욱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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