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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y 17. 2024

다정소감


 


지친 날에는 “힘들지?” 한마디가 위로가 된다. 회사를 그만 뒀을 때는 모두가 “왜”를 물을 때 한 사람이 “그랬구나, 잘했어.”라고 말했다. 우습게도 이 말에 용기가 솟는다. 진심이 담긴 다정한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강한 도파민이 폭발한다. 다정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통제이자 치료제, 영양제이다.  


제목 <다정소감>은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말이다. 동시에 김혼비 작가가 일상에서 얻은 다정하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을 뜻하기도 한다. 작가가 겪은 무수한 다정의 순간들을 여름 동안 정성껏 얼려 내보내는 글들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감상이요, 다정을 다짐하는 일이기도 하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모두 22편의 산문이 수록돼 있다. 이야기가 벌어진 순서도 제각각이고 엮인 사람들도, 상황도 다르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금 김혼비 작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사실을 알거나 모르는 타인이 본의 아니게 다정한 호의를 베푼다. 그 다정한 호의를 자양분삼아 스스로를 일으키는 식이다.  


그 중에서도 ‘비행기는 괜찮았어’가 인상깊다. 김혼비 작가가 외항사 승무원이 되어 첫 비행을 앞뒀을 때, 손으로 하는 거의 모든 것에 놀라울 정도로 재주가 없던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머리부터 화장까지 30분 안에 준비를 끝낼 수 있게 됐을 때도 한 시간이 더 필요했다. 첫 비행 전날 밤, 늦게까지 비행 전 브리핑을 준비하느라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그만 1시간이나 늦어버린 것이다.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씻고, 화장하는데 잘될 리가 있나.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발을 동동 구를 때 거짓말처럼 초인종이 울린다. 문 앞에 여자 동기 네 명이 서 있다.  다들 침대에서 바로 몸만 빠져나온 듯 파자마 위에 점퍼를 걸친 차림으로, 얼굴에는 졸음을 조롱조롱 붙이고 집에 들어와서는 A는 빗, B는 헤어드라이어, C는 핀과 스프레이, D는 브러시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화장도 머리 손질도 서툰 동기가 걱정돼서 새벽바람 맞으며 달려온 사람들. 늦지 않게 준비를 마친 그녀는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무사히 첫 비행을 떠난다.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등 뒤로 따뜻한 눈빛들을 가득 품고 살짝 펴보는 어깨 같은 것이 연대이고, 다정이 아닐까.  


왜 아니겠는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언제나 어디서나 방법은 있다. 다정과 배려를 받아본 사람은 학습효과 탓인지 몰라도 타인에게도 다정하다. 주저앉은 친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물을 떠다 주고, 어깨에 묻은 검불을 털어주고, 부드럽게 등을 밀어주는 일을 자연스럽게 한다. 사랑하는 것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을 몸으로 익히는 셈이다. 


읽고 보니 각 소제목은 작가가 겪고 느낀 후에 마침내 내디딘 결론이다.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을 경계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고 고백한다. 논리적으로 내린 참신한 결론은 시야를 넓혀 다른 곳을 보게 하는 통찰을 담고 있다. 


나만을 믿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꼰대질이 될까 봐 충고를 아끼고 머뭇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꼰대질 환영!’을 외치고, 후손을 괴롭히며 제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한국 조상의 이미지는 이미 최악일 테니, 이제는 ‘밥에 환장한’ 이미지로 소비하는 조상 혐오 행위를 멈추자며 이제라도 제사를 지내지 않음으로써 조상에게 깊은 신뢰를 표현해보자고 주장한다.  


일상에서 맞닥뜨린 무례함과 가시 돋친 말들은 내상을 남긴다. 관심을 가장한 무례를 범하기 전에 다정한 눈빛, 다정한 손길, 다정한 말투로 서로를 치유해 보는 건 어떨까. 내 안에 새겨진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을 만든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았다. 서로에게 기대 마을을 이루고, 힘을 합쳐 생존해왔다. 내 안에 묵혀둔 다정 DNA를 꺼내어 함께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관심이란 달짝지근한 음료수 같아서 한 모금 마시면 없던 갈증도 생긴다는 것을, 함께 마실 충분한 물이 없다면 건네지도 마시지도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한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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