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여름문구사라는 관광지가 있다지? 제주도에 가면 꼭 들러보리라 다짐하고 지도에 위치 표시를 꾸욱 누른다. 분명 여행객들이 추천하는 관광지로 알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포털사이트에 등록된 업종 분류는 '문구, 팬시용품'이다. 본래 귀염뽀짝한 소품을 파는 기념품 가게인데, 다녀간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제주도 관광 명소가 됐다. 이쯤 되면 궁금하다.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인기일까.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여름 문구사'는 절기마다 문구사 이모가 직접 쓴 입간판이 반기는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옛날 슈퍼마켓 느낌의 복고풍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여름 문구사>는 문구사에서 혼자 일하는 이지언 사장이 외로워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낸 책이다. 낯가리는 주인장은 손님의 안부를 시시콜콜 묻는 대신 이렇게 글과 그림으로 소통한다.
주인장은 일부러 찾아오기엔 그냥 동네 문구사라고 소개하지만 이곳 심상치 않다. 어디서 이런 물건을 구했을까 궁금해지는 독특한 액세서리부터 하찮지만 작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품들 천지다. 가게가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를 준다면 책은 사연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여름 문구사>는 작은 즐거움을 찾는 문구사 이모의 제주살이와 일상 이야기를 촘촘하게 다룬다. 제주에서 작은(그러나 유명한) 문구사를 운영하며 겪는 에피소드, 제주생활자가 몸소 체험하고 들려주는 애환, 소소한 즐거움 등을 위트있게 담았다. 읽는 내내 키득키득 웃음이 터지기도, 살짝 눈망울이 글썽해지기도 한다. 마치 친구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쓴 손글씨가 이 책의 매력을 더한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지옥이 있나요? 저는 마음속에도 지옥이 있고, 냉장고 속에도 지옥이 있어요. 바로 양배추지옥이에요. 썩은 양배추를 못 버리고 냉장고 문 열 때마다 양배추 눈 마주치면서 죄책감, 후회, 자아비판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냉장고 속에 있는 저만의 지옥이에요. 이 지옥 내 손으로 없앨 수 있는데,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내 과오와 마주할 용기. - p.72
제주 특산품 레드키위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 인상적이다. 북적북적 와글와글 대가족인 제주도의 가족들을 부러워하면서 소규모 자영업자인 여름 문구사 사장은 그 외로운 마음을 레드 키위로 달랜다. 제주의 가을에 잠깐 맛볼 수 있는 레드키위는 무화과와 그린 키위의 장점을 합친 것으로 시지 않고 달다는 제법 홈쇼핑 방송스러운 홍보를 곁들인다. 신맛이 없어 부모님들도 정말 좋아한다며 제주에 온다면 오일장에서 레드키위를 꼭 맛보라고 당부한다. 어떤 맛이기에 이렇게 강력 추천할까 궁금해진다. 이렇게 제주에 꼭 가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이지언 사장은 목포에서 배타고 올레길을 걸으러 왔다가 폐업한 농약사 자리에 문구사를 차리고, 9년째 그 자리에서 문구사를 운영하고 있다. 여행지에서 애써 ‘여름 문구사’를 찾아온 손님들이 실망을 할까봐 문구사 입구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No 큰 기대, Yes 작은 즐거움!’ 서문에는 요즘 치킨 값과 책값이 비슷하니 치킨만큼의 즐거움을 드리자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밝힌다. 치킨이 주는 만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쾌함이다.
그런데 이 문구는 우리네 일상 곳곳에 대입할 수 있다. 무엇이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허튼 기대보다는 작은 즐거움을 찾아 일상을 감사히 여기자는 교훈을 얻는다.
계절,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뜨겁고 끈적인다고 다들 짜증나는 계절이라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이지언 작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것들을 좋아했다 싫어했다 변덕이 심한데 늘 변치 않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여름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여름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고 덧붙인다. 지금까지 나에게 여름이란, 가을을 만나기 위해 견뎌내야 하는 구간이었다면 올 여름은 왠지 문구사 이모를 떠올리며 조금은 더 뽀송뽀송 행복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문구사 이모가 당부한 말마따나 모두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여름날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