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양각색인 우리 삶에서 유일하게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운다. 힘들 때 일으키는 힘도 결국 사랑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이 끝나는 순간 본인의 삶도 함께 내려놓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사랑의 끝이 설사 비극이라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삶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책이나 영화, 드라마로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소비하는 이유 역시 각기 다른 사랑들 속에 우리의 삶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이 스산해지기 시작한 초겨울에 읽은 사랑 이야기는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다. 이 소설은 2005년 '한일 우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소설로 한국에서 공지영, 일본에서 츠지 히토나리가 각각 여자와 남자 시각으로 썼다. 좀처럼 사랑이야기를 하지 않는 공지영 작가가 로맨스 소설이라니.
그동안 작가의 산문을 더 좋아했던 까닭에 소설에 의문을 갖고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내 빠져들었다. 장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동해를 사이에 둔 청춘 남녀가 안타까워서 가슴이 아렸다. 사랑할 때의 설렘과 불안 같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요가 소설에 그대로 살아있다.
먼저 그 여자 이야기, 최홍은 윤동주 시집을 끼고 젊은 시절의 윤동주처럼 일본에 닿는다. 그곳에서 아오키 준고와 우연히 계속 마주치다 사랑에 빠진다. 가족과 친구가 없는 낯선 땅에서 홍이 기댈 곳은 준고 뿐이었다. 문득문득 밀려드는 고독과 불안을 떨치기 위해 홍은 매일 뛰었다. 다툼과 오해를 반복하다 그들의 서툰 동거는 끝이 난다. 지친 홍은 홀로 귀국한다. 혹시 사람에게 일생 동안 쏟을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홍은 그걸 준고에게 다 쏟아버렸다. 절대 잊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지만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 감히 영원 같은 걸 갖고 싶었나 봐. 변하지 않는 거 말이야. 단단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반짝반짝 빛나고 한참 있다 돌아와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려 주는 그런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같은 거. 꿈꾸지 말아야 할 것을 꿈꾸고 말았나 봐. - p.230
그리고 그 남자 이야기, 칠 년 뒤에 아오키 준고는 유명 소설가가 되어 한국에 나타난다. 사사에 히카리라는 필명을 쓴 탓에 홍조차 그의 정체를 몰랐다. 최홍은 아버지의 출판사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와 작가로 두 사람은 어색하게 재회한다.
홍과 헤어진 후 준고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을 매어 둘 수 있었다. 직업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다. 친구들의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때까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홍과 자신의 이야기를 써 갔다. 그녀를 기억하며 쓴 소설은 두 사람의 과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절절했고 바다 건너 그녀에게 닿고 싶었던 준고의 간절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하얀 옷을 즐겨 입던 홍은 지금 어른스러운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 준고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각자의 곁에는 연인이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 두 사람은 일본어로 주로 일본어로 대화하는데 홍이 화가 날 때는 한국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소설은 문화와 언어 차이에서 오는 소통의 한계, 낯선 땅에서 느끼는 무서움, 성별 차이에서 오는 원초적인 차이 등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다룬다.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이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은 아름다웠다. 극복한줄 알았으나 언어가 전부는 아니었다. 결국 사랑은 끊임없는 극복의 연속, 오해와 화해의 반복이었다.
언젠가부터 애매한 열린 결말, 또는 처참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골치 아플 일 없는 단순, 통쾌한 서사가 좋다. 헤어진 지 칠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서로를 잊지 못하는 두 사람. 이들은 각자에게 '사랑했던 사람'으로 남을까,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을까.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읽으면서는 부디 서로 행복하기를, 후회 없이 건강하게 이별하기를 간절히 응원했다.
헤어짐이 슬픈 이유는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주 많이 엇갈리는 인연이면 이미 끝난 인연이 아닐까. 이들은 과거에 갇혀 부질없는 끈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끝까지 진득하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