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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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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이든, 부엌이기만 하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 p.7


요시모토 바나나가 스물네 살에 발표한 데뷔작 <키친>의 첫 문장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부엌이라니. 고통을 다스리는 치유의 공간으로 부엌을 선택하다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렬한 첫 문장 덕분에 주인공의 일생이 궁금해진다.


주인공 사쿠라이 미카게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속에서 지낸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미카게는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유일한 안식처는 부엌, 그곳에서 위안을 찾으며 음식과 요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부엌에서 절망하며 뒹굴뒹굴 자고 있을 때 바나나의 표현대로라면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한 살 아래 남자 다나베 유이치가 나타난다. 유이치는 꽃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종종 들러 꽃을 사갔던 모양이다. 아무리 안면 있는 이웃이라 하더라도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제안은 뜬금없다. 어안이 벙벙한 채 미카게는 유이치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미카게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서 잠들며 조금씩 슬픔을 이겨낸다. 유이치를 혼자 키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엄마 에리코는 미카게에게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식물에 물을 준다.


소설 <키친>은 세 개의 단편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로 구성되었다. ‘만월’은 ‘키친’의 주인공들이 몇 달 후에 겪는 일을 그리고 있다. ‘만월’ 첫 문장은 “가을의 끝, 에리코 씨가 죽었다”로 시작한다. 성형수술로 아름다워진 에리코를 스토커가 나이프로 살해한 것이다.


겨울이 되고 나서야 유이치는 미카게에게 간신히 엄마의 죽음을 알린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미카게와 유이치는 서로를 위로하며 점차 가까워지는데...


미카게와 유이치는 서로 좋아하면서도 깊은 슬픔에 눌려 선뜻 사랑을 결심하지 못한다. 이때 유이치를 짝사랑하던 다른 여자가 보다 못해 한마디 한다. 늘 그렇게 어중간한 형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연애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힘든 일이라고.


소설에서 음식은 서로를 보듬고 사랑을 확인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미카게는 한밤중에 맛있는 가츠동을 사서 시름에 젖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유이치를 찾아간다. 할머니와 에리코에 의해 떠밀리듯 이어진 우정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즐거운 일과 괴로운 일이 얼마든지 있겠지만 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다.


<키친>은 서늘한 가슴을 서서히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 특유의 치유, 구원으로 나아가는 힘 있는 이야기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 양면처럼 우리 삶에 공존하는데, 우리 모두는 삶이 향하는 곳이 죽음이라는 걸 인식하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내는 것이 인생길이다.


바나나의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된 분위기가 있다. 자연의 충만한 힘이나 물건에 깃든 온기, 고인이 남긴 사랑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인물들이 이 힘을 동력삼아 힘을 얻고 앞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그리고 유독 특정 음식, 특정 장소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바나나 작가는 맛집이나 이자카야를 좋아해 그런 가게를 찾아다닌다고 한다. 여행지 역시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으로 여행을 추억한다고 한다. 책을 읽은 후에 줄거리보다도 “이렇게 밝고 따스한 장소에서, 서로 마주하고 뜨겁고 맛있는 차를 마셨다는 기억의 빛나는 인상”(만월), “빛과 꽃이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길”(꿈꾸는 하와이) 같은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다.


몽글몽글 따스한 날씨에 어울리는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작가의 소설들은 큰 사건은 없지만, 오래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특징이다. 아프고 슬프지만 결국엔 따뜻하게 끝맺는다. 복잡한 서사 없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마성의 힘이 있다. 이봄에 어울리는 따뜻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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