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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의 자세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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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넘긴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생각이 많이 유연해진 점이다. 요즘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구나”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사회는 언제나 열심히 사는 법만을 강조한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완벽하게. 그런데 궁금하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진짜 도태되고 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안고 불안해하고 있을 때 하완 작가의 <대충의 자세>를 읽었다. 이 책은 그런 압박에서 살짝 비켜나도 된다고 말해준다. 덜어내는 삶, 느슨한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특히 작가가 이야기한 “중요한 것에 에너지를 쓰고, 덜 중요한 건 흘려보내라”는 구절에 눈이 멈췄다. 나는 늘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 애썼고, 실수하면 자책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만든 기준에 나 자신을 묶고 있었다. 작은 일 하나라고 지나치게 집중하고 조금이라도 잘하려고 했다. 나 자신을 위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주변의 평가와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던 나날들이다.


하완 작가는 “대충 산다는 건 포기하거나 무책임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태도”라고 말한다.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요즘 나는 일부러 대충 살아보려 노력 중이다. 안달복달 하지 않고 훌렁훌렁 넘긴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은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 받고 나눌 대화, 입을 옷, 가는 길까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당일 아침에 마음이 내키는 대로 입는다. 물론 처음엔 죄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충 했던 일이 오히려 더 상쾌하게 풀리기도 한다. 아껴둔 에너지는 한 곳에 몰아 쓸 수 있으니 더 오밀조밀하게 균형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대충 하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을 용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용기, 지금의 나로도 충분하다는 용기 말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이 어려웠다. 나만의 원칙을 정하고 하나씩 마음가짐을 다잡아 보았다. 우선 새로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대신, ‘대충이라도 하면 다행’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자. 무리하거나 게으르지 않은 절묘한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 멋이라는 시각을 갖자.

인상 깊었던 구절은 ‘계획하지 않을 용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이다.” 이 문장을 읽고 힘들게 쥐고 있던 연필을 슬며시 놓았다. 맞다. 계획한다고 다 그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뜻대로 되지 않으면 더 깊이 자책한다. 이제는 하완 작가처럼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 어때서.”라고 읊조린다.


내 삶이 고통일 뿐이라도 그 고통 역시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삶은 반드시 끝나니까. 죽음. 그것은 내게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 반드시 끝나게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만약 삶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끝이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도 버텨볼 만한 게 아닐까 싶다. - p.79


하완 작가의 <대충의 자세>는 단순하게 게으름을 미화한 일기가 아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지금 이 삶이 충분히 의미 있다는 성찰이 담긴 책이다. 극단적으로 열심히 살지도 않고, 무력하게 흘러가지도 않는 내 삶의 리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잭슨 폴록은 물감을 흩뿌리는 방식의 '액션 페인팅'으로 주목받은 화가다. 그는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일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의미를 생각하고 나서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리고 나서 의미가 생긴 것이다. 그의 '액션 페인팅'은 20세기 추상 미술의 정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일단 꼼꼼하게 모든 걸 계획해서 작업하는 게 아니라, 하다 보니 길이 보이는 것. 폴록의 그림은 그런 점에서 살면서 길을 찾아가는 삶의 여정과 닮았다.


완벽하진 않아도 큰 것은 얼추 끝낸다는 책의 담론과 맞닿아있다. 폴록의 그림이 삶의 소소한 잔뼈가 아니라 척추를 그려낸 것처럼, 세밀한 곳까지 너무 완벽해지려 하지 말고, 얼추 중요한 것만 챙기면서 살아가자는 얘기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덜 괴롭고 부드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물으며 살고 싶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다짐했다. 조금 비워도 괜찮고,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고.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자세가 어쩌면 '대충'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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