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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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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창문을 열면 밖에서 용광로 같은 열기가 한꺼번에 들이쳤다. 맑은 날은 건식 사우나, 비오는 날은 습식 사우나 같아서 찜통 같은 더위는 선풍기나 얼음물로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 더운 오후에 도피처로 책을 선택했다. 박연선의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이다.


단순히 짜릿한 제목에 이끌렸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 이야기는 강렬하고도 선명한 여름 그 자체로 느껴졌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금방 익어버릴 듯 뜨거운 시골의 공기, 쨍쨍 울어대는 벌레 소리와 먼지 낀 폐가의 기묘한 기운들. 이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루는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어느 날, 서울에서 무기력하게 백수로 지내고 있는 강무순은 “지금 내려와. 시체 나왔다.”라는 황당한 연락을 받고 첩첩산중 두왕리 마을로 향한다. 무순은 할아버지의 책장에서 15년 전 자신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지도를 발견한다.


보물지도에 그려진 대로 경산 유씨 종택을 찾아가 보물상자를 파낸 무순. 보물상자와 마주한 순간, 무순을 좀도둑으로 오해한 종갓집 외동아들 꽃돌이와 맞닥뜨린다. 순간 무순을 발견한 꽃돌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신의 누나이자, 15년 전 실종된 경산 유씨 종갓집의 귀한 외동딸 유선희의 물건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5년 전, 당시 최장수 노인의 백수 잔치에 온 마을 어른들이 버스까지 대절해 온천으로 관광을 떠났다. 그사이 동네 아이들을 마을에 남았다. 마을이 텅 빈 시간, 꽃돌이의 누나 유선희를 비롯해 삼거리 허리 병신네 둘째 딸 황부영, 발랑 까지긴 했어도 평범한 집안 딸이었던 유미숙, 목사님 막내딸 조예은까지 모두 네 명이 사라졌다. 나이도, 학교도 다른 소녀 넷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경찰, 과학수사대, 심지어 무당도 포기한 전대미문의 네 소녀 실종 사건! 경찰이 추측한대로 단순 가출일까? 아니라면 대체 누가 네 명을 한꺼번에 납치했을까? 자신의 딸이 외계로 갔다며 뒷산에서 매일 울부짖는 교회 사모님은 정녕 미친 것일까?


4차원의 최강 백수 강무순, 팔십 노인 홍간난 여사, 츤데레 꽃돌이. 이 얼렁뚱땅 탐정 트리오가 벌이는 추리 수사가 꽤 흥미진진하다. 마치 개그 콤비라도 되는 듯 진지하게 헛소리를 하는 모습이 꽤나 유쾌하다. 학교 다닐 때 반에 한명쯤은 있을법한 뻔뻔하고 허술한 캐릭터가 떠오른다. 신나게 깔깔대며 웃다가 어느새 서늘해지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소설이 표현하고 있는 여름 특유의 감각들이다. 매미 소리, 비린내 나는 웅덩이, 콩나물국밥을 먹는 더운 점심시간, 그리고 골목 어귀에서 마주친 동네 주민들의 묘한 시선들. 이런 요소들은 우리가 두왕리 마을을 굳이 가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의 여름이 얼마나 짜증나게 습하고 찌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박연선 작가의 저력인 것 같다. 소설에 사건과 함께 공기, 땀 냄새, 땅의 기운까지 우겨넣어 독자를 빨아들인다.


과연 범인이 누굴까? 시체는 어디에? 라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하다가 어느새 슬며시 인물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고, 또 웃다가 울컥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웃긴데 슬프고, 어설픈데 똑똑하며, 시끄러운데 조용하다.


네 명의 소녀는 모두 같은 사건에 연루된 게 아니라, 각자 다른 이유로 실종되거나 사라진 상태였다. 두 사춘기 소녀는 가출을 했고, 한 명은 우체부가 소녀를 성폭행하려다 반항하자 살해해 버렸다. 나머지 한 명은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실종돼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치료 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여겼던 '네 소녀 실종'은, 다양한 현실 속 이유들이 겹친 오류였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예민해야 할까?, 공동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사라진 소녀들은 단지 피해자가 아니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말을 하지 못했으며, 우리는 그 삶의 흔적에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이 조용한 질문이, 한여름의 마을 전체를 감싸며 우리 마음을 무겁게 두드린다.


실타래라는 게 말이여. 처음부터 얽힌 데를 찾아서 살살 풀어야 하는디, 그냥 막 잡어댕기다 보면 야중에는 죄다 얽혀 갖고는 어디가 얽힌 줄도 모르게 되지 않디? 딱 그짝이란 말이지.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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