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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테 Jan 16. 2022

이걸 등지고서 걸을 거였다면 여기 안 왔지.

산티아고 순례길 day 16


2019.10.16

산 후안 데 오르떼까 San Juan de Ortega 르델뉴엘라 리오삐꼬 Cardenuela Riopico


혜수랑 아침 일찍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제 날씨가 제법 춥다.

점점 출발하는 시간을 늦춰야 할 것 같다.


벤치에 앉아 배낭을 메는데 자전거 두 대가 보인다.

엄마, 아빠, 삼 남매의 자전거 순례길이라니.


저들에게 이 여정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큰 밑거름으로 작용까 싶어서 미소가 지어진다.

하늘이 점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나는 이게 왜 이렇게 좋지???'

도저히 발걸음이 안 떼어진다.


찍고 찍고 또 찍고.

영상으로도 담고 사진으로도 담는데도 아쉬운 마음이다.

그런 나의 뒷모습을 혜수가 찍어주었다.


풍경사진만 잔뜩 담아내며 다녔는데 문득 나도 인물사진을 담아보고 싶어 진다.

누군가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내가 너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런 느낌이야.'

라는 느낌으로.


출발을 했음에도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정말 오래도록 머물렀다.


'급할 거 뭐 있어. 가야 할 목적지가 있긴 하지만 굳이 빨리 갈 필요가 있을까. 지금 아름다운 순간이 여기 있는데. 이걸 등지고서 걸을 거였다면 여기 안 왔지.'



걷다 보니 거대한 표지판이 나왔다.

살펴보니 곧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사실 길에서 마주치는 화살표 방향대로 따라가는 게 제일 편하다. 가장 일반적인 길을 알려주기에.

다만, 화살표가 두 갈래로 나눠져 있을 때는 그 순간 끌리는 길로 가버린다.


어차피 산티아고 대성당이 목적지인 건 변함이 없고 어디로 가든 그곳으로 가게 될 터이니.

뭐 그렇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잖아.


그래서 굳이 고민하지 않는 편이다.

어디가 더 좋은 길인지 미리 살펴보는 게 솔직히 귀찮기도 하지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별로라고 하는 길도 내가 걸어서 좋으면 그만이니까.

아, 역시 나무 냄새, 흙냄새, 숲 냄새는 최고다.

너무 좋아.


그렇게 길을 걷는데 어제, 다음 마을로 넘어갔던 '알베'라는 친구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왜 다시 오지?'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이 길이 좋아서 다시 걷으려고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무가 많은 길이 여기서 끝이라던 '알베'.


갑자기 뒤통수를 빡! 맞는 기분이었달까.

어제에 이어 그는 도대체 뭐지?!


일단 내 시야에서 (물론 나도 나무를 좋아하지만)

다시 걷고 싶을 만큼 예쁘다고는 느끼지 못했고,

그렇게 느꼈다한들 이 힘든 순례길을 다시 되돌아가 반복해서 걷는다?!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 못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여정을 여유롭게 음미하며 즐기고 있구나.

진국이다.


한동안 그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멍 때렸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정말 각자만의 방식으로 이 여정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멍을 때리며 걷다 보니 즐거운 광경이 펼쳐졌다. 말과 소들이 그냥 방목되어있었다!


송아지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길래, 그게 너무 귀여워서 하이텐션으로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안녕 안녕!!!! 너, 너무 귀엽다!!! 너도 알아???"


하지만 역시나 나는 '알베'처럼 다시 되돌아가 이 길을 또 걷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혜수와 오래도록 이곳에 즐기며 머무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구름은 손에 닿을 것 같았고 꼭 만져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또 멀리 한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헤스. Ages.

표지판 너무 예쁘다.

'아헤스'란 마을은 곳곳이 포토스폿이었다.

나중에 순례길을 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이곳 마을에서 하루를 머물러봐야겠다.

그렇게 아기자기한 화분들이 있는 카페테리아에 들어갔다.

혜수와 함께 샐러드를 주문했다.

토마토, 당근, 올리브, 옥수수, 양배추, 그리고 직접 갈아주신 오렌지 주스.

'쎄요'를 찍어달라고 했더니 아주머니께서 직접 꽃과 하트를 그려주셨다.

'부엔 까미노' 메시지도 함께.


그리고 후숙 된 바나나 2개도 사 먹었는데

진심 너무너무 달고 맛있었다. 스페인에서 계속 실패하던 바나나였는데.


하아 잊지 못할 것 같아...

바람이 오늘도 많이 분다.

중무장을 하고 걸었다.

하지만 샐러드와 오렌지로 기분이 up 된 나.

왠지 몸이 신나 하는 기분이었.

그렇게 도착한 또 다른 마을,

아따뿌에르까 Atapuerca.


정확히는 모르지만, 가장 오래된 인류 조상의 마을 중 하나인 것 같다.

뭐- 하지만 그런 거에 크게 관심 없터라

딱히 휴식을 취하지 않고 지나다.

때때로 무슨 글귀인지 궁금한데 번역의 한계에 부딪히며 결국 무슨 의미인모른 채 넘어가기도 한다. 아쉽다.

다음 마을인 '부르고스'. 

큰 도시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 꽤 멀리 떨어진 거리인데도 부르고스 표지판이 많이 보인다. 

얼마나 크길래 부르고스, 부르고스 하는 걸까?

길을 걸으면서 나는 오늘 묵을 숙소를 정했다.

그만 걷고 싶다는 신호가 왔다!


혜수는 더 걸을지 말지 고민하더니, 역시 한 번에 부르고스로 가기는 무리라 판단는지 오늘도 서로 같은 곳에 머다.

산 위에서는 코 앞에 보이던 마을이 막상 내려와서 걷다 보니 코 앞은 무슨, 걸어도 걸어도 마을이 안 보인다.


역시 직접 겪어봐야 다.

그저 대충 멀리서 쉬워 보이네-

하는 거야말로 제일 쉬운 이다.


오늘의 알베르게 도착.

비아 미네라 알베르게. Albergue via minera.


저녁이랑 내일 아침 식사까지 신청했다.

숙박 6유로, 저녁 9유로, 아침 1.5유로,

총 16.5유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니, 좋다.

그리고 오늘도 부엔 까미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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