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걸크업 Oct 07. 2021

어쩌면 그저 계속 나아가는 게 우리의 목적일지도 몰라

산티아고 순례길 day 15 

2019.10.15

벨로라도 Belorado → 산 후안 데 오르떼까 San Juan de Ortega


오늘은 혜수랑 같이 출발했다.

달이 너무 예쁘다.

달을 보던 내 뒷모습을 혜수가 찍어주었다.


혼자 걸었다면 담지 못했을 내 모습을 

동행하는 친구가 대신 남겨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즐거움이 느껴졌다.

어느덧 554,6km가 남았다.

줄어들지 않을 것만 같던 숫자였는데 말이야.

오늘도 물들어가는 아침 하늘을 보며 걸을 수 있어서 설레었다. 

첫 번째로 만났던 마을에는 카페테리아가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격도 약간 비쌌다.

하지만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이기에 불만스럽지는 않다.

커피를 시켰다.

아침햇살과 함께하는 친구, 그리고 맛있는 커피까지 있으니 여유로움이 올라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도 있는 거구나.'


순례길 여정을 시작한 후로 점점 하루의 시작이 여유로워지고 있다.

그 여유로움에 행복과 즐거움이 더해지니 왠지 모르게 나에 대한 만족감마저 커지고 있다.


앞으로도 나의 하루가 늘 여유와 함께 시작되기를.


가게를 구경하다 보니 강아지들을 발견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되게 귀여웠다.


여정 중에 묶여있는 강아지들을 많이 보고는 하는데,

사실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저 묶여만 있는 것이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생명체들은 자유를 갈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휴식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난 뒤, 혜수와 다시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또 신나게 걸어봐야지.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순례자 모양의 나침반이 눈에 띄었다.

두리번거리면서 걷다 보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곤 한다. 

오늘도 발견한 'BUEN CAMINO!'

요즘은 거의 이런 평지를 걷고 있다.

편해서 좋기도 하지만 솔직히 계속 똑같은 풍경에 지겹기도 하다.


인생도 마냥 편하기만 하면 막상 지루하지 않을까?

굴곡이 있다는 건 어쩌면 그만큼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배우며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음을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마을도 안녕.


그렇게 길을 걷는데 사진 속 이 장소에서 '알베'라는 친구가 다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힘들어서 쉬고 있는 줄 알았다.


"왜 여기 있어?" 

라는 혜수의 물음에


"지금 여기 너무 예쁘잖아!"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구경을 안 할 수가 있겠어?" 

라는 듯한 여유와 마인드가 놀라워 그를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알베라는 친구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그는 800km의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에 멈춰 가만히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급할 것이 전혀 없다.

걷다 보면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건 사실 당연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목적지만을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골인지점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가 아닌데 말이야.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조급해할 필요도 전혀 없고.


솔직히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해도 뭐 어때.

다른 길을 또 걸어가게 될 텐데.

인생에 단 하나의 정답 같은 목적지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어쩌면 그저 계속 걸어 나가는 게 우리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5~6년 간의 경찰수험생활을 지나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다른 여정을 꿈꾸고 있는 것처럼.


어떤 여정을 지나쳐왔든 지나가고 있든 그 자체로 모든 길이 정답일지도.

그 과정 속에서 여유와 즐거움을 느끼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인생을 그리 살아가고 싶다.


또 다른 마을이 나왔다.

마을에 도착하면 괜히 무언가라도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나를 본다.

기억에 남지 않는 사진들이 많지만 그런 사진마저 없으면 추억할만한 것조차 없어지니까.

이곳에서 먹었던 갈릭 수프는 진심 맛있었다.

무슨 거하게 해장하는 느낌이었다. 

또 먹고 싶다!

계속 마주치던 순례자분들과 사진도 함께 사진도 찍었다.

왜 계속 걸어도 550km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혜수랑 기념사진도 찍고.

그나저나 점점 손만 타고 있다.

배를 채우고선 다시 출발!


우리를 따라 나오던 고양이가 문 앞까지 오더니, 딱 저기서 멈추고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마치 배웅을 해준 듯했다.


"배웅해줘서 고마워 야옹아!"


오르막길 오르기. 

1100m를 향해서.

이미 940m였다는 함정이 있지만.

그래도 엄청 높게 오를 줄 알고 든든하게 배도 채우고 단단히 마음도 먹고 출발했던 건데, 

막상 그렇지 않아서 허무하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일단 오랜만에 산길을 걸었던 거라 기분이 상쾌했다.

기념비 같은 것이 보이길래 잠시 벤치에 앉아서 쉬기로 했다.


그러다 한 외국인 분이 알려주셨는데,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그들의 영혼을 기리는 비라고 알려주었다.

둘러보니 영어로 설명이 쓰여있기도 했다.


그리고선 초콜릿도 나눠주셨다.

오렌지맛이 났다. 

쉴 때마다 신발 벗고 있기.

중간중간 발 스트레칭은 필수다.


참 예쁜 길이었다.

드디어 오늘 머물려던 마을에 도착했다!


혜수랑 마을을 둘러보니 알베르게 두 곳은 이미 모두 다 찼고, 성당 알베르게 한 곳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알베'라는 친구가 성당 알베르게는 시설이 진짜 안 좋다고 혜수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문득 진짜 그런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렇다고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성당 알베르게에서 묵을래."


혜수도 다음 마을로 갈까 말까 고민하더니 결국 오늘도 서로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굿 초이스가 되었다.

생각보다 시설도 괜찮았고 깨끗했다.



혜수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오늘도 나는 베지테리안 메뉴를 시켰다.

그리고 점점 올리브의 매력에 빠져가고 있는 중이다.

올리브를 늘 빼고 먹었던 나인데, 이제는 올리브부터 먹는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여행의 묘미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 이 순간, 함께 걷고 있음에 감사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