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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테 Jun 21. 2021

지금 이 순간, 함께 걷고 있음에 감사해.

산티아고 순례길 day 14 (그라뇬→벨로라도)

그라뇬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아침 7시에 성당에서 주는 조식을 먹었다.


아침 8시.

이제 출발해야지!


길을 나서기 전, 성당 분들과 한 번씩 포옹을 나누고선 작별의 인사를 했다.


"부엔 까미노"

"그라시아스"


숙소를 나서며 이렇게 따뜻한 허그로 마무리를 지었던 적은 또 처음이라 은은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어제 만났던 잭과 브라이스도 함께 동행했다.

몇 걸음 걸었을까. 동갑내기 친구 혜수와 싱가포르 친구 릴리아나가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다 같이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알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5명이서 출발을 함께 하네!

이 길을 걸으며 문득 '추억은 방울방울'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떠올랐다. 거기서 나온 대사 내용이 오버랩되며 정말 자연은 광활하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사실 내가 보는 이 자연도 본래의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결국 이 조차도 인간들의 손이 오랫동안 닿아오고 다듬어져 온 것이지- 라는 생각.


어차피 이 지구에서 자연도 인간도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더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결국 자연에서 나오는 것들이기에, 엄밀히 따지자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있을까?

내 뒤에서는 발의 통증으로 절뚝이며 걸어오는 잭과 내 앞의 브라이스와 혜수, 릴리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이들과는 어디까지 또 함께 걷게 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일단 지금은 이들과 함께 하니 즐겁고 재밌다. 이들과 떨어져서 다시 혼자 걷게 된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혼자 즐겁고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들을 또다시 만나게 될 수도, 혹은 또 다른 인연을 만날 수도 있을 거란 생각.

그럼 그건 그것대로 또 즐겁겠지.


모든 인연들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놔둘 때, 진짜 즐거운 만남이 될 수 있겠구나. 이 만남들을 당연시 여기지 않게 되며 언제 어디서 헤어질지 모르니 그 순간을 그저 소중히 진심으로 즐기는 것.


무엇보다 함께이든, 혼자이든 나는 한결같이 있는 그대로의 단단한 나로 존재한다는 것.

금세 띄엄띄엄 서로 간의 격차가 또 벌어진다. 자연스럽다.


얼마 전에 우연히 잠시 같이 걷게 된 분이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 내 걸음이 되게 느린 편이라 생각했기에, 내가 느리니 먼저 가셔도 된다고 했었다. 혹여나 나의 느린 걸음에 맞출까 봐, 그녀가 자신의 페이스대로 못 가는 것일까 봐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이제는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느샌가 별다른 인사말 없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속도대로 각자의 여정길을 걸어간다.


그전까지는 상대가 혹여나 나에게 맞출까 봐 미안함+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상대는 상대의 페이스대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걸음이 나와 걷다 보니 다소 느려졌을 수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상대방만의 페이스였다. 잠시 느리게 걸으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건 그의 판단이자 결정이었던 거다. 


내가 그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오히려 교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 기준에서 상대가 나에게 맞춰주고 있다고만 생각하며 단정 지어버렸으니까. 그게 부담스러워질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내 걸음이 느리니 먼저 가도 된다고' 선수 친 거였으니까.


서로 이야기하다 자연스레 다시 자신만의 길을 나아가면 그뿐인 것을.  맞춰달라고 할 수도, 맞춰줄 수도 없는 것을.


그러니 미안함이 아니라 함께 걷게 되었을 때 그저 감사함을 느끼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함께 걷고 있구나.'라고.

나의 지나간 모든 인연들에 대해서그리 생각하고 싶어 졌다.


고마웠다고.

즐거웠다고.

그리고 앞으로 모든 여정들을 응원한다고.

엄청나게 거대한 표지판이 나왔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기가 경계선인 모양이다.
큰 지역의 이름이 바뀌는.

사진이 실물보다 예쁘게 잘 안 나오길래 프로모드로 바꿔서 찍었더니 또 실물보다는 푸른빛 느낌으로 찍혔다.


그 순간 느꼈던 감정과 기분, 그걸 느끼게 해 주던 풍경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아내서 기록하고 싶다.

동행인들이 생기니 서로의 앵글에 종종 찍히곤 한다. 일부러 상대를 담아내기도 하고 내가 찍으려는 풍경에 상대가 들어오기도 하고. 어떻든 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상대가 드는 카메라에 굳이 내 걸음을 멈추지 않게 됐다. 예전에는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으면 배려를 한다고 내 걸음을 멈추고는 했다.


이 여정길에서는 굳이 그러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누가 봐도 인물 사진을 찍는 경우에는 제외)

상대의 사진에 내가 찍히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어진 부분도 있지만, 상대가 찍는 풍경이나 앵글에 내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 피해가 아니라는 생각이 커졌다.


마음에 안 든다면 상대가 사진을 다시 찍겠지.

혹은 반대로 누군가의 모습이 담겨서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 


판단은 상대의 몫이고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면 되지 뭐.

어떤 마을에 들어섰다.

릴리아나, 브라이스, 혜수, 그리고 나.


이렇게 다 함께 한번 찍어보고 싶었다던 혜수와

덕분에 돌아가면서 한 장씩 추억사진을 건진 우리들.


함께 걸을 때의 즐거운 점은 역시나 건져가는 추억 사진들도 많아진다는 점!

순례길 여정의 묘미 중 하나는 마을 곳곳에 그려진

귀여운 낙서와 그림들이 아닐는지.

그렇게 마을에서 다 같이 잠시 쉼표를 찍고서는 출발했다.

한참을 걸었을까. 아스팔트 길에 이리도 귀여운 스마일을 만났다.


"아 너 너무 귀여운 거 아니니?!"

누워서 셀카 찍던 혜수 옆으로 함께 동참했다.

햇빛에 눈을 못 떴지만, 아 이리 누워버리니 너무나 편하고 행복한 것.


이 여정을 여유롭게 즐겨보자며 온 것인데

뭐가 더 필요해?!!

뒤따라오던 잭이 모자를 씌워주었다.

그래서 내 신발과 스틱도 함께 놓아주었다.

스마일 순례자 완성! ^_^/


누군가의 그림에 또 다른 이의 모자와 나의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니 즐거움이 되는구나.

어느덧 산티아고가 576km가 남았다.


아직 반도 못 온 것인데도 줄어져 가는 숫자가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이 '아쉽다'는 의미는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이 여정이 줄어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동안에는 지나간 것들에는 원래 아쉬움이 항상 남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 여정길을 걸으며 이 관념이 무너져감을 느낀다.


하루하루 열심히 걷고 있고, 내가 마주하는 인연과 장소, 길에 대해서 최대한 담아내며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비우며 깨달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저 즐겨보려 한다. 그래서 소중하고 특별하다. 이 모든 것들이.


그래서 아쉬움이 담길 틈이 없다.

앞으로도 나의 모든 여정을 그리 걷고 싶다.

또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신발 안 가득 예쁜 꽃들이 담겨있다. 모든 발걸음이 꽃밭이기를 바라는 마음일까?ㅎㅎㅎ

이 무렵쯤이었나.

길을 걷다가 어느 유명 연예인의 죽음을 접했다. 한껏 up 되어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굉장히 맑아 보이고 화창해 보이는 하늘과 구름.

심지어 해도 쨍쨍하게 떠있다.

하지만 비바람이 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사진만으로는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그저 화창한 줄로만 알겠지.


역시 쉬이 판단해서는 안됨을 다시 한번 느낀다. 아무리 예쁘고 좋아 보이고 화창해 보여도 실제로 그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사람들이 타인을, 타인의 삶과 행동방식에 대해서 자기 기준에서 쉽게 재단하고 평가한다고 종종 느낀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좋아 보인다 해서 남과 나를 비교하부러워하 열등감을 가질 이유도 없지만, 나의 가치관과 다르다고 하여 함부로 '틀렸다'라고 판단 짓는 일도, 그럼으로써 내가 '옳다'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일도 고 넘어갈 문제다.

벨로라도 Belorado에 도착했다!

릴리아나랑 브라이스는 먼저 걸어간 상태였고, 혜수 잭과 셋이 함께 도착하게 되었다.


사실 걷다가 다들 흩어지게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함께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왔기에

덜 힘들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순례자 아저씨

어떤 알베르게 앞이었는데 인테리어가 너무 귀여웠다.


이런 걸 보면서 만약 내가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더 오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회에 내가 공급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 3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나는 어떤 공급자가 되어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산티아고'라는 영화에 나오는 실제 주인공의 손&발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이 여정을 떠나오기 전에 봤던 영화라 인증샷을 담아본다.

오늘의 알베르게 도착!!!

아저씨 너무 귀엽잖아!

Cuatro Cantones 알베르게

샤워도 안 하고 혜수랑 밥부터 먹으러 왔다ㅋㅋㅋ

비바람에 힘들게 왔으니 오늘 같은 날은 맥주 시며 즐겨야지.

벨로라도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구경했다.

마을이 생각보다 작고 조용다.

카페

혜수랑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고서 마트에서 과일을 산 뒤 숙소에 들어왔다.

4인실이었고 거의 호스텔급이라 완전 럭키!

오늘은 16km를 걸었고 총 6시간이 걸렸다.


내일은 또 어떤 여정이 이어지려나~

그럼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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