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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여행#1 수원 화성

기억을 쌓아 만들어진 도시


규격화된 아파트와 높은 건물들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흔적이 쌓이면 독특한 개성을 가지게 된다. 권력과 욕망의 흔적,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땀과 정성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공간이 로컬이고 그 독특함을 찾아가는 여행이 로컬여행이다.


걸어야 보이는 것들


봄날의 따스함을 기대하고 준비한 여행이지만 수원 역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122만 인구를 가진 도시답게 번잡했다. 바로 목적지인 화홍문까지 택시를 탈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걷기로 했다. ‘걷다 지치면 타야지!’ 하는 마음으로 우산을 쓰고 물웅덩이를 철퍽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찰랑” 발바닥에 느껴지는 느낌이 장난꾸러기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서 걸음이 더 경쾌해졌다.

어느 도시든 원 도심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대형 마트의 반짝거리는 과일보다 빨간 다라에 담긴 제철 과일이 폼은 안 나도 왠지 새콤달콤한 기억의 맛으로 입 속에 침을 고이게 했다. 조금 외진 골목 안으로 들어오니 낡은 건물 여인숙의 ‘하루 1만 원!’ 간판이 보였다. 일거리를 찾아온 이주 노동자나 도시 근로자가 싼 맛에 묵을 법한 공간. 들어가 보지 않아도 짐작 가능한 작은 방, 오래된 건물의 쾌쾌한 냄새, 상상만으로도 일상의 피곤함이 느껴져 비 오는 거리를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비에 하루를 공친 일용직 근로자는 그 만 원짜리 방에서 느리게 지나가는 하루를 견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도시의 골목골목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 블록을 더 들어가 차가 다니지 않는 오래된 골목길로 접어드니 수십 년 자리를 지키며 아는 사람만 드나드는 시골 구멍가게 같은 점포도 눈에 띄었다. 선반 위에 진열된 과자와 냉장고의 음료수만 봐도 이 동네 사람들의 인기 상품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정조 대왕의 도시, 계획의 시작


수원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꿈을 넘어 자신이 꿈꿨던 정치, 군사, 경제의 실험장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게 전쟁과는 관계없지만 아름답게 쌓음으로써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해지니 아름답게 쌓아라”

정조 대왕의 꿈의 도시 화성이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겸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정조는 화성을 축성 할 때 백성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공사의 내용을 모두 [화성성역의 궤]라는 기록으로 남겨 공사 실명제를 구현해 냈다. 공사에 참여한 인원들의 명단, 작업 일수, 지급된 품삯, 축성 방법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하지만 정조의 기록 사랑은 더욱 지극했을지도 모르겠다. 철저한 계획과 실학자 정약용과 함께 거중기를 도입하는 등 실용과 기술을 현실에 반영하고 효율적인 관리가 2년 8개월이라는 짧은 공사 기간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건제한 성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성 안쪽 북수동에는 상설시장인 시전상가를 성 밖 팔달문 앞에는 신분과 상관없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었다. 정치 군사에 치중하지 않고 상업과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키려는,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은 정조의 꿈이 실현된 장소이다 지금도 팔달문 밖에는 9개의 시장이 정조의 유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성 밖 시장의 모습을 정조대왕이 보신다면 자신의 꿈이 양반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손으로 이루어 낸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을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그림자와 겹쳐진 기억


화성의 수난은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시작됐다. 수원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수탈을 위한 식민 도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수원역이 경부선과 연결되며 일본인을 위한 금융회사와 유흥업소 등이 생겨났고, 도로를 만들기 위해 성곽은 파괴되었다. 행궁은 사라지고, 조선의 영화를 기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없어지고 방치됐다. 성곽은 전쟁과 자연재해로 형태가 변해갔다. 조선의 도시 위에 일본의 질서가 겹쳐지고, 전쟁의 흔적이 남았다. 서로 다른 색의 시간들이 쌓여가는 시절이었다.

지금도 수원역 주변에는 근대의 건축물이 그 시절의 기억을 말하고 있다. 근대 건축물은 양가적 감정을 가지게 한다. 빈티지한 외관이 주는 멋은 시간이 만들어낸 매력을 지녔지만, 그 매력을 만든 시간이 우리의 상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 편히 좋아하기만은 어렵다. 건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보면 일본 강점기의 수난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진 속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찡그린 얼굴들을 보면, 희망으로 꿈틀거리던 정조의 시간에도, 수탈을 당했던 식민지의 사간에도, 전쟁과 산업화의 격변 속에서도 사람들은 모든 시간 지금 나처럼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여기 삶이 이어지는 곳


수원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수원천의 옛 이름은 ‘한내’다. 정조시대에는 ‘유천’이라고 불렸으며, 화성은 이 유천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정조는 “유천성의 이름처럼 버들잎 모양과 천(川) 자의 모양을 해야 한다”라고 하며 북쪽 성곽을 밀어 나뭇잎 모양으로 만들고, 유천의 서쪽에 천(川) 자 모양으로 성곽을 설계했다. 화성의 축조 이후에도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고 하니 화성과 버드나무의 깊은 인연을 알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수원천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줄 같은 존재였다.. 오래전 사진 속에서도 화홍문 아래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냇가에서 고기를 잡고 멱을 감았다고 하니 수원 사람들에게 수원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닌 삶 그 자체였다. 산업화의 시기를 지나며 오염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시민들과 지자체의 노력으로 이제는 송사리, 버들치, 피라미가 살고 있는 생명 가득한 하천으로 회복되었다.

정조의 시대 어린 버드나무는 이제 수원천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보호수로 자랐고, 개천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유천을 즐기는 방법은 바뀌었지만, 화홍문 아래를 지나는 수원천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이 모이는 곳이다.

위정자의 역사는 책에 남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시민들은 시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게가 나무그늘 아래 벤치가 놓이며, 마을이 넓어지고 사람들의 음악과 이야기가 채워진다, 그리고 이 시간이 쌓인 미래에도 수원천에는 버드나무 그늘아래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손을 맞잡고 걷는 연인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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