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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Jun 13. 2017

당위명제와 미적명제의 건전성에 대하여 (1)

1.흄이 지적하듯 극단적 회의주의(Extreme Pyrrhonism)와 극단적 독단주의(Extreme Dogmatism)는 둘 다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비생산적인 스탠스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과학적, 수학적 도그마티즘과 종교적 도그마티즘에는 차이가 없으며 판단의 오류가능성을 완전히 소거하는 것이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무분별한 진술 역시 지양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회의적인 태도가 지식습득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모티머 아들러가 지적하듯 학적 정직함은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태도에서, 이러한 태도는 곧 온당한 의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어느 진술이든지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p라는 주장을, 다른 누군가가 ~p라는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의심의 도움 없이는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는 스탠스는 따라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누구든지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진술에서만큼은 의심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진실에 대한 논쟁은 중요하다(De veritate disputandum est). 그렇다면 취향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De gustibus non disputandum est)한가? 다시 말해 미와 선은 객관적인가? 아들러에 의하면 참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사실을 온당히 반영하는 명제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나에겐 참인 것이 너에겐 참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네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판단 층위에서의 진술이 아니라 참은 상대적이라는 것, 즉 누구에게는 참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참 개념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참이라는 개념의 상대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용어에 대한 이해결여에 불과하다. 예컨대 우리가 책상을 연필이라 부르고 지우개도 연필이라 부르고 연필도 연필이라 부르기 시작한다면 <연필>이라는 이름은 이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연필>이라는 단어의 외연을 무분별하게 확장시킬 때 이 단어의 내포는 붕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ㅡ듀이의 도구주의적 관점이나 여타의 상대주의적 진영에서 왕왕 말하듯이ㅡ참이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단지 주관적인 견해(subjective opinion)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인 진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일 수 없으며, 차이가 있는 것은 단지 참에 대한 의견뿐이다. 그렇다면 몽테뉴의 문화적 상대주의는 어떻게 설명가능한가? 아들러는 이를테면 어떤 문화에서는 옳은 전통이 다른 문화에서는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참거짓에 대한 사안과 취향에 대한 사안을 가능한 한 엄밀하게 구분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보자면 논리실증주의자나 경험주의자들과 자연주의적 상대주의자들이 진선미 개념의 객관성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객관적인 의미로서의 참이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진리관이나 대응설적 진리관같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적어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물자체에 대한 진술이나 수학적 명제같은 정합설적 진리관에만 적용되곤 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객관적인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 관한 명제는 진리치획득조건, 요컨대 사실명제로서의 자격에 미달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1) 어떻게 규범적 명제의 진릿값을 도출할 수 있는지, (2) 기술적 명제(descriptive proposition)에서 규범적 명제(prescriptive proposition)를 연역하는 것은 불가하며 자연주의적 오류에 불과하다는 흄과 무어의 지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하는 물음에 우선적으로 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러니까 특정 당위명제들의 건전성을 논리적, 합리적으로 연역할 수 없다면 우리는 가치명제적 진술에 대해 주관주의적, 정의주의적, 상대주의적 스탠스를 택하거나 제 3의 방법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1)과 (2)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3.규범적 명제의 진리치를 도출하기 어려워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특정 진술이 함의하는 내용이 반영하는 실재와의 정합성으로부터 해당 명제의 참/거짓 여부를 연역해내기 때문이다. 즉, 규범적 명제의 진리치가 존재가능하다면 그것은 참이라는 개념에 대한 내포적 확장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그렇다. 그렇다면 그러한 내포적 확장은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한가? 아들러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ㅡ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려서ㅡ<올바른 갈망에 대해 정합적인 판단>이라는 층위의 내포를 <참>개념에 포괄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서 옳지 않은 갈망이 갈망해서는 안 되는 갈망을 의미한다면 옳은 갈망은 요컨대 우리가 갈망해야만 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전부 다르다면 갈망하는 것 역시 전부 달라야만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가?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앗티카 철학의 거장인 소크라테스가 양분해놓은 실제적 선(real good)과 피상적 선(apparent good)의 구분지점과 맞닥뜨린다. 소크라테스는 갈망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갈망의 선함을 보장해주진 않는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 무언가를 갈망한다고 해서 내일도 그것을 갈망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갈망의 대상이 아무리 지금 당장 좋아보여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명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갈망하는 것이 곧 선이라면 옳은 갈망과 그른 갈망의 구분은 갈망이 가변적이라는 전제 하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가변적/후천적 갈망과 불가변적/선천적 갈망의 구분필요성을 연역할 수 있다. 전자는 문화와 환경 같은 외적 요인과 상호관계를, 후자는 성욕과 식욕 그리고 수면욕 등등의 자연적인 갈망 내지 욕구를 포괄한다. 이는 후천적 갈망과 선천적 갈망의 기본적인 구분법이며 <필요하다>는 술어와 <원한다>는 술어의 차이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4.모티머 아들러에 의하면 <필요한 것에 대한 갈망>은 곧 옳은 갈망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선천적 갈망이며 선천적인 갈망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열된 아들러의 설명은 근본적으로 애드혹의 오류와 논점선취적 해명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그는 어째서 선천적 갈망이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고사하고 명확한 예마저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식을 갈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식을 갈망한다고 주장했다 해서 <인간이 실제로 본성적으로 지식을 갈망한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아들러는 지식추구에 대한 당위명제의 건전성(soundness)이 결코 부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아들러의 주장은 (1)<우리는 실제적 선을 갈망해야만 한다>는 당위명제와, (2)<지식에 대한 추구는 실제적 선에 해당한다>는 두 가지의 언명이 참일 때만 성립하지만, 아들러는 (1)과 (2)를 부정하는 회의주의적 비판을 만족스럽게 논박하지도 않았고, <내가 볼 때 (1)과 (2)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며 이러한 부정은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식의 괴이한 의미 불명의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1)과 (2)가 필연적인, 심지어 분석적인 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더불어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대논거를 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아들러는 일차적으로 (1)과 (2)를 공리화하고 있는 듯이 보이고 이러한 명제에 대한 부정이 어째서 논리적 모순을 함축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건전하다는 주장과 함께 제시된 위 명제들 (1)과 (2)는 사실상 기존의 논증에 새로운 당위명제를 도입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흄과 무어의 지적에서 벗어나기도 힘들어 보인다. 또한 각 명제들에 대한 비판들도 제기가능하다. 아들러는 예컨대 (1)을 통해 우리가 실제적 선을 갈망해야만 한다는 당위명제를 제시하는 이유로 실제적 선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추가적인 근거들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며, 설령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명증된다 해도 그것이 어떻게 실제적, 본질적인 선과 동치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지에 관한 부가적인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2)는 지식에 대한 추구가 실제적 선에 해당한다고 역설하지만, 우리는 이미 근대 이성중심주의적 지식추구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고 있다. 사이먼 배런-코헨이 날카롭게 지적했듯 과학자들과 의사는 지식추구라는 계몽주의적 명목 하에 아우슈비츠를 세웠고 빅토리아 시대의 유럽열강들은 기술의 발전과 공공사회의 모더니즘적 안녕이룩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비위생적인 일터에서의 노동착취를 자행했다. 지식추구가 지식탐욕으로 변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지식추구가 그야말로 가치중립적인 그 무엇이라는 결론을 발굴하게 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래서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 지식추구의 부재는 우매한 대중을 낳고 지식추구의 과잉은 무고한 사회구성원들의 자본적 대상화를 야기한다. 그뿐이다. 지식추구의 양 극단이 하나같이 비극으로 이어진다면 명제 (2)는 처음부터 지식추구의 정도를 고려하지 않은 언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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