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의 아침, 그곳에서 나는 풀꽃이 되었다

카르기스스탄 알라아르차 계곡

by 글곧

키르기스스탄을 다녀온 기억이 새롭다. 일정 마지막 날 오전을 이용해서 천산산맥의 일부 산을 올라갈 기회를 가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수도 비슈케크 시내를 벗어났다.

비슈케크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자 알라아르차 국립공원(Ala-Archa National Park) 입구가 나타났다. 산 입구에 산장 같은 여관 하나가 보이고 그 뒤로 큰 산들과 협곡들이 보인다. 1976년 설립된 이 국립공원은 천산산맥의 키르기스 알라타우(Kyrgyz Ala-Too) 산맥에 속해 있으며, 4,895미터 높이의 세미오노프 티안샨스키(Semenov-Tian-Shansky) 봉우리를 비롯한 여러 고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아직 산 위로 해가 솟아 오르지 않아 어스름한 상태에서 산을 올랐다. 가파르고 좁은 비탈길을 한 동안 오르니 해가 솟아올랐고 산의 한쪽 면이 뻘겋게 물드는 장관을 연출한다. 천산의 일출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대기 때문에 유난히 선명하다고 한다. 붉은빛이 암벽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가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캔버스에 붓질 하나로 색을 입히는 것 같았다.

계곡이 점점 멀어지고 산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알라아르차 계곡으로 불리는 이곳 저 밑에 큰 게르 하나가 있는데, 이 나라 총리가 외국 귀빈에게 오찬을 제공하는 곳이라 한다. 실제로 알라아르차는 키르기스스탄의 ‘국가적 자부심’이 담긴 장소다. 구소련 시절부터 등반가들의 훈련장이었고, 독립 후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자연유산으로 여겨지며 외국 정상들이 방문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한참을 오르다 숨을 잠시 고르기 위해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허브 향이 난다. 주변을 살펴보니 키 작은 여러 색깔의 풀꽃들이 널려있다. 에델바이스, 야생 백리향,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융단처럼 깔려있다. 키르기스 유목민들은 예로부터 이 고산 허브들을 차로 우려 마시며 고산병을 예방했다고 한다.

저 멀리 흰 눈으로 덮여있는 산봉우리들이 보인다. 함께 간 현지인이 그 봉우리 중 하나를 가리키며 “코리아”라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민 그 봉우리는 “픽 프리코레야(Pik Freekorea, 4,740m)“라고 한다. 픽 프리코레야 봉우리는 6·25 전쟁 당시인 1950년대 초 소련 등반가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등반되었는데, 전쟁에서 북한을 지지한다는 뜻을 담아 ’ 자유조선(Free Korea)’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말한 ‘자유’는 남한이 아닌 북한을 의미했다.

그럼 어쩌랴? 지금은 한국인이 더 많이 이 나라에 진출해 있고, 저 높은 천산산맥 봉우리가 ‘코리아’인 것을! 키르기스스탄에는 약 2만여 명의 고려인 동포와 한국 기업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비슈케크 시내에는 한국 식당과 한류 문화가 퍼져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K-pop은 일상이 되었다. 냉전의 유산으로 명명된 봉우리가, 이제는 다른 의미의 ‘코리아’를 상징하게 된 셈이다.

3,000미터를 좀 더 올랐더니 조그만 평원이 나타난다. 이름 모를 조그만 동물이 목을 빼고 우리를 구경한다. 키르기스어로 ’수르(sur)’라 불린다는 이 설치류는 천산의 상징적 동물로, 높은 고도에 적응해 살아가는 생명력의 아이콘이다. 4,000미터 이상의 고봉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끝이 안 보이는 저 밑 계곡을 바라보니 거대한 자연을 느끼게 된다.

털썩 주저앉아 땀을 식히는데, 저절로 입에서 탄식이 나온다.

이제야 천산산맥을 보는구나! 장대함과 깊음 속에 익숙한 아늑함이라니! 큰 자연을 대하면 자신이 왜소해진다고 했나? 부족하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천산(天山), ‘하늘의 산’이라는 이름은 과장이 아니었다. 중국 신장에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2,500킬로미터 이상 뻗어 있는 이 산맥은 실크로드의 배경이자, 수많은 문명이 오가던 길목이었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천산의 눈은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라고 읊었고,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는 길에 넘었던 것도 바로 이 산맥이었다.

신기하게도 핸드폰이 터진다. 집사람과 며느리 하고 영상통화로 근처 고봉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만큼 높은 데 올라온 것을 은근히 자랑했다. 문명과 단절된 듯 보이는 이 고산 지대에서조차 신호가 잡히는 것은, 키르기스스탄이 산악국가임에도 통신 인프라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큼은 천산의 장엄함과 현대 기술의 편리함이 묘하게 공존했다.

산이 높은 만큼 공기는 청량하고 물은 깊고 맑다. 알라아르차 계곡과 고봉들의 광대함의 광경에 숨도 파묻힌다. 정갈하고 청정한 원시의 자연 속에서 나도 키 작은 풀꽃이 된다.

도시에서는 늘 무언가를 성취하고, 증명하고, 쌓아 올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높은 곳에서 보니, 내가 쌓아 올린 것들은 얼마나 작은가. 저 마못처럼, 저 풀꽃처럼,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바람을 맞고 햇살을 받으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산길은 더 조용했다. 입이 아니라 가슴으로 천산을 담았다. 비슈케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와야겠다고. 그때는 더 천천히, 더 오래, 저 풀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물어가며 걸어야겠다고.

천산의 아침은 그렇게 나를 작고 겸손한 존재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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