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암각화, 그 오래된 교실 앞에서
태화강 상류, 반구천에 절벽 하나가 있다. 너비 약 8미터, 높이 약 4.5미터. 그리 크지 않은 이 바위 면에는 수천 년 전 누군가의 손길이 남긴 흔적들이 빼곡하다. 50마리가 넘는 고래들이 그곳에 살아 숨 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돌 속에 갇혀 영원히 헤엄치고 있다.
가슴지느러미가 유난히 긴 혹등고래, 새끼를 등에 업은 채 유영하는 귀신고래, 두 갈래로 물을 뿜어 올리는 북방긴수염고래, 향고래까지. 놀라운 것은 그 세밀함이다. 수면 위를 뛰어오르는 고래의 역동성, 물을 뿜는 순간의 생생함, 새끼와 나란히 헤엄치는 모성까지. 이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관찰의 기록이었고, 생존의 교과서였으며, 세대를 잇는 지혜의 전승이었다.
목숨을 건 사냥, 그리고 귀환
상상해보라. 신석기 혹은 청동기 시대의 어느 이른 아침을. 10명 남짓한 사내들이 큰 뗏목에 몸을 싣는다. 손에 쥔 것이라곤 사슴뼈로 만든 작살과 질긴 나무껍질로 엮은 그물뿐이다. 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그 뗏목 위에서, 그들은 수십 톤이 넘는 거대한 생명체와 맞서야 했다.
맨 앞에 선 이는 가장 경험이 많은 사냥꾼이었을 것이다. 고래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작살을 움켜쥐고 바다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급소를 정확히 찌르지 못하면 고래는 미친 듯이 날뛰고, 뗏목은 한순간에 뒤집히고, 차가운 바닷물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성공한다 해도 고래 한 마리를 육지로 끌어오기까지는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공했을 때의 보상은 컸다. 한 마리의 고래는 마을 전체를 몇 달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고래기름은 등불이 되었고, 뼈는 도구가 되었으며, 가죽은 옷이 되었다. 고래잡이는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 그 자체였다.
암각화, 선사시대의 블랙박스
돌아온 사냥꾼들은 그날의 사냥을 잊지 않으려 했다. 경험 많은 어른은 조상들이 그림을 새겨두었던 그 바위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정으로, 돌로, 혹은 더 단단한 무언가로 오늘 잡은 고래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이 종은 어떻게 헤엄치는지,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어떤 순간에 가장 위험한지.
어느 날 저녁, 젊은 사냥꾼들이 그 바위 앞에 둘러앉았을 것이다. 노련한 어른은 돌에 새겨진 고래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했을 것이다.
“이놈은 꼬리가 세다. 작살을 맞으면 뗏목을 단번에 뒤집는다.”“저 고래는 새끼와 함께 다닌다. 새끼를 건드리면 어미가 돌진한다.”“이 고래는 물을 두 갈래로 뿜는다.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지.”
그것은 교실이었다. 생존 기술을 전수하는 학교였고,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였다.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블랙박스이자, 위험을 기록하고 지혜를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였던 것이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
고래잡이는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맞서고, 미지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거대한 생명체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작은 뗏목으로 망망대해에 나가 고래와 싸운다는 것. 그것은 해양을 극복하고 정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래서일까. 울산은 예로부터 고래잡이의 고장으로 이름났고, 지금도 고래고기를 파는 식당들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바로 그 울산 앞바다 조선소에서는 매일같이 초대형 선박들이 탄생해 전 세계 바다를 누빈다.
어쩌면 이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천 년 전, 뗏목을 타고 고래와 맞섰던 그 용기가,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 DNA가, 지금도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구대의 바위에 새겨진 것은 고래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바다를 향한 도전, 생존을 위한 지혜,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배려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바위는 묵묵히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수천 년 전 그날의 함성과 파도 소리, 고래의 숨소리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