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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May 23. 2024

치매일기 3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잔인한 4월

1995년 남편이 내게 T.S. ELIOT의 영어로 된 시집을 선물했었다. 시집에 만나서 차나 한 잔 하자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서 내게 무심히 주었었다.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에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만 알고 있던 때라 펼쳐보지도 않았다. 신중히 답을 기다리던 그는 고민 끝에 책을 보았냐고 물었다. 그제야 책을 펼쳐보니 그 부분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았다.


2024년 4월 우리에게 몹시도 잔인한 달에 그가 30년 전에 주었던 그 책이 떠올랐다. 내 평생 가장 잔인한 4월이었다.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왔고 새벽에 잠을 깨면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공포스러웠다. 위로의 말들도 원망스러웠고 좋은 말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나마 시간이 약이었다. 하루하루 살아내는데 집중하고 인지능력에 좋다는 걷기를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남편과 둘이서 매일 걷기 코스를 조금씩 달리 하고 안 가본 식당이나 카페에 가서 쉬면서 하루 4시간 정도를 걸었다.


제주에서 부산으로 거주지를 이전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있는 병원을 다니는 것이 힘들었다. 기차가 나으리라는 판단으로 옮겼는데 모든 면에서 만족한다. 문 앞 배송도 도심의 북적거림도 심지어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송정과 해운대에는 걷기 코스가 잘 가꾸어져 있다. 카페도 식당도 많고 도보로 활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제주에 있을 때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주위는 고요했고 새로운 곳을 걸으려면 일단은 차를 타고 나와야 했다. 가장 힘든 것은 거의 매일 내렸던 비다. 비는 사람을 필요이상으로 더 슬프게 깊이 가라앉게 만들었다. 부산의 날씨는 우리를 도와주었다.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것도 삶에 대한 애정과 여유가 있을 때 가능했다. 가족이 병을 진단받으니 모든 것에 의욕이 떨어지며 세상일에 다 흥미가 없어지고 하찮게 여겨졌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었고 보호자인 내가 힘을 내어야 했다. 인터넷 카페에 정보를 얻으려 들어갔다가 오히려 환자들의 나빠지는 상태와 보호자의 힘든 삶을 읽다 보면 오롯이 그 상태가 나에게 전가되었다. 담담하게 기록하는 누군가의 글에서 위로받고 싶었다. 또한 나도 고통받고 정보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을 나누고 싶다. 병은 어쩔 수 없이 발생했고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노력해야 한다. 어쩌겠는가?


지난주에는 성모병원에서 뇌파검사와 PET CT 검사를 했다. 병원 가는 길 곳곳에서 사람들은 시위를 하고 정치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다른 고민이 없으니 저렇게 나와서 악을 쓰는구나 싶었다. 다행히 딸이 회사에 휴가를 내고 병원에 동행했다. 자식에게 굳이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으나 옆에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것이 이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것이 환자를 둔 가족에게 진정 필요한 일이었다. 받고 싶은 것은 성의를 담은 따뜻한 위로와 행동이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그저 손잡아주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함께 견뎌주는 것이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봄날 그는 정원에서 우연히 나비의 누에고치 하나를 발견했다. 다가가서 보니 고치의 한쪽에 작은 구멍이 뚫리면서 나비가 막 빠져나오려 하는 순간이었다.


나비는 아주 천천히 그 작은 입으로 고치집을 헤치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나비가 빨리 나오도록 누에고치에 대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온기를 받아 나비의 작업이 한결 쉬워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비는 갑자기 따뜻해진 기운을 받아 얼른 고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비는 나오자마자 그의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다. 나비가 고치집을 빠져나오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그의 성급함이 나비를 죽게 만든 것이다.


시간은 필요하다. 때로 그것이 어둠 같고 길 없는 길 같아도 이 삶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급함은 나비를 죽게 만든다. 나비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비의 삶을 사는 것이 애벌레의 길인 것이다.


우리들 자신 속의 애벌레를 고요히 지켜보라. 그것이 거쳐 가야 할 수많은 시간들에 대해 한숨짓긴 해도 그것은 필요한 일이다. 자연이 일깨워 주는 가장 큰 것은 바로 기다림의 필요성이다.

  

-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류시화 -



하느님께 기도했었다. 저는 큰 고통을 감당할 그릇이 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울었다. 그러나 울면서도 신께서 내 손을 놓지 않으시리라는 것은 알았다.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을 나중에 주시는 하느님, 부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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