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체로 추운 날엔 작고 이곳 저곳 해어진 낡은 박스 안에서, 더운 날엔 장판 위에서 대자로 뻗어 잠을 잔다. 짧둥한 두 앞발과 펑퍼짐한 엉덩살, 뽀얀 뱃살. 오는 고양이 가리지 않고 오는 사람 가리지 않는다. 도도하고 까칠한 회색 고양이가 잘 나가는 도시 청년이라면, 이 노란 고양이는 순박한 시골 청년이다.
거리낌 없는 태연함과 따뜻한 호기심, 타고난 천연덕스러움과 남다른 포용. 평범한 고양이가 갖지 못한 것, 그리고 평범한 인간 조차도 갖지 못한 것. 부드러운 밀크티에 카라멜 시럽을 왕창 쏟은 듯한 그 외모만큼이나, 이 노란 고양이의 묘품은 가히 남다르다.
성격이 매서운 한 살 터울의 회색 고양이는 나머지 세 고양이에게 자주 앞발을 휘두른다. 멸치 같이 마른 몸에 면봉 같은 앞발은 슬쩍 보기엔 글쎄. 딱히 위력이 없어 보이지만 휘둘렀을 때의 힘은 '탁' 소리가 허공을 가를 정도다. 자주 성을 내는 회색 고양이가 동생 고양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고 있을 때면 노란 고양이는 거실 한 복판에서 배꼽 자랑을 하다가 느즈막히 나타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떡 하니 서서 한 마디 한다.
사건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조용히 마무리 된다.
사람보다 나은 고양이
나에게는 5살 터울의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나이 차가 적지 않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관용과 이해를 강요받았다. 누나니까 이렇게 해야지. 누나니까 참아야지. 나는 그 말이 제일 싫었다. 그런데 다 크고 나서 동생에게 들어보니 둘째는 또 둘째만의 고충이 있더라. 누나와 비교가 된다던가, 누나한테만 다 사준다던가, 자기 말은 잘 안 들어준다던가. 전형적인 둘째 콤플렉스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한참이나 뒤에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나만 짜증났던 게 아니었어!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란 고양이가 위로 하나, 아래로 둘의 고양이를 놓고 원만한 형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 점은 가히 놀랍다. (이들은 심지어 친형제 사이도 아니다!) 형제 사이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쟁을 해결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에서 난 두 마리의 동생을 살뜰히 보살피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어찌나 살뜰한지 잠에서 깨면 늘 셋째, 넷째 순으로 빗질을 해주는 것이 그의 일과.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고 안부를 묻는 따뜻한 마음. 살뜰히 보살피고 아끼는 부지런함. 리찌는 그렇게 어린 시절 내가 내 동생에게 해주지 못했던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한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고양이에게 친절과 사랑, 위로와 포용을 배운다.
냥똥 철학자 찌크라테스
대 코로나 시대가 개막하기 직전,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해보고 싶은 도전이 있었고, 일이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마음으로. 3년 동안 일한 대가로 여행을 떠났다. 마스크 없이 푸른 하늘 아래서 제주를 만끽하고 돌아오자, 이제 더 이상 마스크 없이 돌아다닐 수 없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아지겠지... 하고 1년이 지났다. 그리고 내 통장 잔고는 점점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이 싹을 틔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안을 가득 채웠던 자신감과 패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영영 내 인생이 더 나아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이 차올랐다. 이 불안이란 녀석은 한낮의 태양 아래선 숨을 죽이고 있다가, 어두운 밤만 되면 요동치는데 그럴 때 나는 더듬더듬 한 줌의 약 대신 이 노란 고양이를 찾는다.
세상의 근심 걱정 따위 모두 지나갈 일이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니. 철학자 혹은 석가모니 같은 얼굴을 하고 (사실 별 생각이 없겠지만) 나를 보는 이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을 만지고 있노라면 이 진흙탕 같은 세상을 맨 몸으로 구르고 있는 내 수치와 모멸 따윈 하찮은 것임을 깨닫는다. 그저 어떻게든 세상은 흘러갈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이 고양이가 가진 위로와 안도의 힘을 동경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름 탄탄한 근거가 있다. 우리 집에 들어온 이는 누구라도 떠나가며 '리찌'를 찬양하고 마는데 이 광경을 수차례 목도한 나는 마침내 이 고양이에겐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작년 11월 넷째 고양이가 왔을 때, 리찌는 매일 방묘문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었다. 이 작고, 하얗고, 생경한 물체를 어떻게든 온전히 파악해버리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그러나 절대로, 이빨을 드러내거나 발을 들거나 경계의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도 넷째는 리찌를 유독 좋아하고 괴롭히며 따라 다니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그의 따뜻함을 동경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기'에 대한 모든 형용사와 단어가 어울리는 나의 노란 고양이. 오랫동안 막내였다가, 또 한참을 '중간 아이'로 지내온 나의 두 번째 고양이. 우리는 이 고양이를 동경한다. 너는 아마 인간과 고양이 세계를 통틀어 가장 멋진 형이자 동생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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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고양이 R
2012년 4월 19일에 태어난 스코티쉬스트레이트+페르시안 믹스
네 마리 고양이 중 둘째 고양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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