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언자 Nov 11. 2016

평범을 갈망하는 그대에게

영화 한공주 리뷰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그냥 삶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냥 삶이라 하기에 좀 그러니 ‘위태로운 삶’이었다고 하자. 시인은 흔히 사람을 꽃에 비유하더라. 그렇다면 이 영화도 한 송이 꽃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너른 들판에 핀 평범한 꽃 이야기라 하기엔 좀 그러니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피어난 꽃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자. 물기 없이 메마른 절벽 틈사이로 짠하게 피어났으나,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왜 거기 피어있냐”고 따가운 눈총을 받다가 찬연한 그 모습 피어내지 못하고 끝내 시들어버린 이야기 말이다.

   한공주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잊혀진 공주들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감독 이수진이 밝히듯 이 영화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가늠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그런 자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려는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영화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소녀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안타깝게 사그라드는 인생을 새롭게 역전시키는 반전이 없다. 분노를 자아낸 범인을 향한 통쾌한 복수 또한 없다. 그저 한 여자 아이의 삶을 뒤바꾼 ‘사건’과 ‘그 이후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날’ 이후 공주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했다. 공주가 원한 것도,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날’ 이후 공주는 악몽에 시달렸으리라. 육체적 정신적 피해는 물론 다시 또 그러한 폭력에 노출될까봐 낯선 이를 무조건 경계해야만했다. 노래하는 순간만큼 가장 행복한 공주였지만, 노래하는 자기 모습이 ‘영상’에 찍히는 것조차 ‘자지러지게’ 싫어했다. ‘그날’ 이후 공주에겐 익숙한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낯선 곳에서, 낯선 몸과, 낯선 기억을 가지고 다시 시작해야했다.

공주는 음악을 좋아했다

   공주는 용기 있는 아이였다. 삶의 끈을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다하는 악착같은 아이였다. 설사 그녀도 그녀의 절친 ‘화옥이’처럼 물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수영을 배웠다. 살고 싶어서 물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주는 정말 살고 싶었다. 그럴려면 끔찍한 기억들과 끝까지 싸워 이겨야한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하는 ‘그날’의 일들과 언젠간 직면해야한다. 그래서 공주는 다시 삶을 시작했다.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괜찮다. 조금씩, 조금씩 물장구 치다보면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나가고 있을테니.

   그러나 무자비한 권력은 끝까지 공주를 추적했다. 공주는 피해자다. 피해자는 보호받아야하고, 치료받아야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성폭력은 다르다. 성폭력을 겪은 피해 여성은 ‘부끄러운 일’을 당한 것이고, 정조를 끝내 지키지 못한 것이며, 성욕에 충실한(아니 그렇다고 오해하는) 남성에게 그럴만한 행동을 했을거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성폭력은 힘 있는 한 개인이 또는 집단이 힘 없는 약자에게 기울어진 권력관계로 벌인 차별과 폭력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엔 이런 인식이 요원한걸까? 왜 피해자가 도망 다니고 숨어야 하는가? 


   “성폭력은 개개인간의 우연적이고 사사로운 갈등, 성차에 따라 본질적으로 다른 성적 욕망에 의해서라기보다 우리사회에 공고화된 다양한 권력관계, 사회구조적인 성차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여성의 낮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와 문화적 편견(성적 편견), 젠더, 인종, 민족, 계급, 나이 등에 관한 통념 등이 긴밀하게 얽힌 결과이다.” (사)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젠더와 사회』, 동녘, 187


   그렇다.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사사로운 감정 또는 갈등에 의해 일어난 사건과 다르다. 이것은 대한민국 사회에 이미 공고히 형성된 ‘권력관계’에 의해 벌어진 폭력이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문화적 편견’이 작용하여 일어난 범죄이고, 남성이 힘으로 여성을 제압하고, 여성의 성을 대상화할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가 일으킨 반인륜적 행위이다. 이것은 엄연한 구조적인 문제이며, 사회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런 중차대한 범죄를 개인의 일탈, 철없는 아이들이 ‘뭣 모르고’ 저지른 일 정도로 여긴다. 또 ‘공주’가 그렇게 처신했으니 그런 일이 일어난거 아니냐며, 도리어 공주를 찾아와 뼛성을 부린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은 없다. 가해자 부모들은 “우리 아들 인생을 망치려는 거냐”며 공주에게 단체로 찾아와 항의한다. 공주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이다. ‘도망가는 것’.


   살아 보려했다. 남들처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비범’이 아닌 ‘평범’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주에겐 ‘평범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범죄의 무게에 걸 맞는 책임을 지는 ‘평범한 일’은 공주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의 낯을 피해 도망해야하고, 피해자인 본인에게도 ‘과실’이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공주에게 일어났다. 공주는 어찌할지 몰랐다. 두려워했다. 무서웠다. 그리고 외로웠다.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연일 보도되는 성폭행, 집단 강간, 왕따, 폭행 사건들을 전해듣는다. 그리고 분노한다.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화를 낸다. 때론 명백히 반인륜적인 범죄가 일어났음에도, 무슨 영문인지 제대로 된 수사조차 이뤄지지 않는 것을 보며 ‘도대체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라 물으며 분노한다. 좋다. 다 좋다. 그러나 분노하고 있는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다. ‘당신은 이러한 사건의 피해자에게든 가해자에게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이 만약 내 주위에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해줄 것인가?’


   분노하던 것과 다르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러한 사건을 깊게 알지 못한다. 그저 ‘반인륜적인’ 사건의 표층에 의해서 분노한다. 이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리도 모르게 사그라드는 공주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하려면, 적어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한다. 무엇이 이러한 사건을 발생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고, 왜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왜 우리 사회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지 물어야만 한다. 

성폭력 사건의 근본 원인을 물어야 한다.

   앞서 밝혔듯 공주에게 일어난 일은 ‘개인의 일탈’ 또는 ‘그릇된 성적욕망’으로 발생한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전혀 관계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문제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성폭력 사건의 본질은 바로 ‘권력관계’에 있다. 성폭력은 “구조화된 폭력”이다. 이미 한 사회에 공고히 형성된 위계관계에 의해서 약자가 짓밟히는 폭력인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는 도망쳐야 할 이유도, 숨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건 평범하지 않은 일이다. 정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 성폭력은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 생득적 권리인 “성적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가 보호 받아야 했으나, 박탈당한 것이 바로 성폭력이다. 따라서 공주에게 일어난 ‘그 날’의 사건은 공주의 “보편적 인권”이 박탈당한 범죄였으며, 당연히 보호받아야할 공주의 “성적 자유”가 강제로 침해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런 맥락과 구조적인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영화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성폭력이 위계화된 사회 구조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인식이 우리에겐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우리 주위엔 얼마나 ‘공주’가 많을까? 사건에 대해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으로 수많은 우리의 ‘공주’들을 얼마나 많이 손가락질하고, 외면했을까? 두렵다. 그리고 미안하다. 마음이 무겁다. 수 많은 공주를 평범한 삶으로 이끌 그 날은 아직 요원한걸까?

작가의 이전글 내가 글쓰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