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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언자 Jun 03. 2021

모세를 가리키는 손가락

김영봉 [그 사람 모세] (복있는사람)을 읽고

* 본 서평은 출판사 복 있는 사람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길을 잃었다

   이방인으로 떠돈 지 어언 3년째다. 제법 이방인 생활에 적응한 것 같다. 적당히 거리 둘 수 있고, 소리 없이 묻어가는 법도 배웠다. 처음엔 적응할 수 없없다. 아무도 모르고, 관심조차 없는 나의 우울한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부끄럽지만 사람들이 주는 인정을 그리워했다. 할 수만 있다면 떠도는 삶을 정리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일단은 버티기로 했다.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한없이 냉소하는 나 자신이었다. 사람을 냉소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찌질함을 마주할수록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모세, 길 잃은 이들을 위한 발자국

   [그 사람 모세]는 길 없는 광야를 앞서 걸었고, 마침내 길을 발견하고 개척한 그 사람, 모세의 발자취를 열일곱으로 추렸다. 모세는 길을 잃었던 사람이다. 이집트 왕자로 모든 걸 누리던 그가 미디안 광야를 떠돌아야 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약속의 땅을 향한 위대한 모험을 이끈 그였지만, 정작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의 속내는 어떠했을까? 사람들은 모세를 “이집트 왕에 맞서는 모습,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는 모습, 시내 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 모습, 금송아지를 두고 광란을 벌이던 백성에게 격노하는 모습 등”(255)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신화화된 모세의 이미지를 한 차원 끌어내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한 인간’으로서의 면면을”(306) 보여주는 모세의 휴머니즘에 주목한다. 그의 탈 신화화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모세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연약한 인간이었으나, 그 연약함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 위대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그가 가지고 있던 온갖 약점과 그가 겪은 수많은 고초를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의미 있습니다. (306)

 

김영봉, <그 사람 모세> (복 있는 사람), 2021

성경의 침묵을 들으라

   성경은 많은 것을 말하나, 동시에 많은 것에서 침묵한다. 역설이다.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진술이 충돌하여 성경은 읽는 이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한다. 성경은 어쩌면 독자에게 겸손하지만 때론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성경이 말하는 많은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되, 침묵하고 있는 말을 듣기 위해 적극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성경이 말하는 모세의 이야기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읽어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상상하고, 해석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터무니 없는 오독이 아닌, “본문에 대한 정교한 주석작업”과 “문학적 상상력”을 곁들인 읽기다.

Moses(Michelangelo, 1513-1515)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모세의 유년기에 대해 아주 짧게만 언급할 뿐 많은 부분에서 입을 닫는다. 저자는 모세의 일생을 크게 세 기간으로 나누는데, “태어나서 마흔살까지”의 첫 시기, “마흔 살부터 여든 살까지”의 미디안 광야에서의 두 번째 시기, 여든 살부터 백 스무살까지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세 번째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앞의 두 시기는 성경이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아 저자는 “모세 시대의 문화적•종교적•역사적 배경”을 살펴 그의 일생을 풍부하게 읽어내고자 노력한다.

 

“~일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설교문이 기초가 되었음에도, “~일 것 같습니다.”, “~일지도 모릅니다.”는 식의 종결형 어미가 많이 보인다. 혹자는 설교자의 언어가 확신이 아닌 ‘추측성 언어’라는 것에 딴지를 걸지 모르겠으나, 때론 설교자의 이런 솔직한 언어가 성경의 진의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의 설교가 말 한 마디를 보태는 식이 아닌 신중하고 솔직한 언사로 잘 정돈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모세와 나의 자화상

   저자가 그려내는 모세의 초상은 고대 근동 세계와 성경의 기록 등 다양한 정황으로 그려진 사람 냄새 나는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이집트 왕자로 자랐으나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간직한 의협심 가득한 모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디안 광야에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모세, 마침내 그를 불러낸 신에게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소명의 무게를 피하고 싶어했던 모세. 저자가 그려낸 모세의 초상을 찬찬히 감상하다 문득 찌질하고, 초라한 나의 자화상을 본다. 위대한 모세처럼 살겠다고 호기롭게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내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다.

 

광야에서

   특히 ‘광야’, ‘연단’, ‘체험’, ‘소명’ 장(3-6장)에서 잃어버린 길을 탓하며, 쉽고 좋아 보이는 길에 곁눈질하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광야는 맨몸으로 걸어야 한다. 사람들의 인정과 평판으로 치장한 모습은 광야에서 거추장스럽다. 방해가 될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나 자신의 모습을 찾고 그 모습대로”(307) 사는 것이 광야가 요구하는 삶의 자세이다. 이렇게 광야의 요구에 순응할 때 저자의 말대로 광야는 곧 기회의 땅이 된다. 길을 잃은 것 같고, 길을 잘못 든 것 같으나 그 곳이 지도가 된다.

 

모세와 예수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저자의 모세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 손가락은 모세의 율법을 완성한 예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약학자인 저자는 자칫 ‘구약의 한 인물 이야기’로 끝날 수 있는 열일곱편의 설교를 탁월하게 - 정말 이 부분에서 저자의 탁월함을 느꼈다 - 예수의 이야기와 연결 짓는다. 특히 모세와 예수의 유사성을 다룬 17장 ‘섭리’에서는 신학적 주제라 할 수 있는 ‘모세 유형론’을 청중들이 알기 쉬운 언어로 주해한다는 점에서 설교자로서 저자의 모습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 곁길로 나가는 말 : 같은 출판사에서 설교에 대한 저자의 강의록, [설교자의 일주일]을 출판했다. [그 사람 모세]를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설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잠깐 들춰봤다. 설교에 관심있는 신학생이나 목회자라면 [그 사람 모세]를 저자의 [설교자의 일주일]과 함께 읽는 것도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모세와 나

   [그 사람 모세]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 사람 모세”(민12:3, 개역개정)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손가락은 집요하게 예수를 가리킨다. 여기까지 저자의 손가락을 충실하게 따라온 독자라면 이것만 해도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세를 가리키고, 예수를 향했던 그 손가락은 마침내 독자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람 모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계속 쓰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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