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이유에 대하여
1.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있다. 기억의 전등이 무작위로 꺼지고, 아직 살아있는 기억의 불빛 순서가 엉키고 말았다. “아야, 우리 ㅈ도 방위 왔냐!”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만,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나는 아직도 수년 전에 끝난 사회복무요원으로 살고있다. 할머니는 유독 큰 며느리, 우리 엄마를 미워했다. 아니 여전히 미워하는 중이다. 무려 35년이나. 알츠하이머는 기억을 잃어가는 병이지 감정을 잃는 병은 아니란다. 큰 며느리를 향한 할머니의 미움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외려 기억의 불빛이 꺼진 곳에 미움의 불빛이 채워진 것만 같다. 큰 며느리에게 쌍욕을 내뱉고, 손찌검을 하기도 한다.
2.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수진과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받고 건축가로 자란 철수의 사랑 이야기이다. 수진은 집안 내력인 알츠하이머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까지 잃는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면, 철수는 자신을 버린 엄마를 향한 미움을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비극의 남주인공이다. 수진은 말한다. “용서는 어려운게 아니야. 용서는 그냥 미움한테 방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훌륭한 목수는 자기 마음의 집을 잘 짓는 사람이래. 자기는 지금 그 마음의 집 속에 미움만 온통 들여놓고 집밖에서 떨고 있잖아.” 수진의 사랑에 용기를 얻은 철수는 마침내 엄마를 용서한다.
3. 그런데 정말 “용서는 어려운게 아”닌걸까? 용서는 ‘용서하기’와 ‘용서받기’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두 행동은 모두 ‘용서’이지만 행동의 주도권이 서로 다른 곳에 있다. ‘용서하기’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반면, ‘용서받기’의 주도권은 나를 용서해줄 ‘그’에게 있다. 단순히 ‘내가 지금 마음 먹고 행동할 수 있나’라는 관점에서만 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건 ‘용서하기’ 밖에 없다. ‘용서받기’는 상대를 향한 진심어린 사과와 뉘우침, 잘못에 대한 나의 책임 그리고 상대의 마음이 누그러질 때 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무작정 기다린다고 해서 용서를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용서받기’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다. 수진의 말대로 용서가 어렵지 않다는 건, ‘용서하기’에 국한했을 때에만 그렇다.
4. ‘용서하기’가 어렵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사람은 용서를 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향한 미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한, 미움은 어느새 분노와 원한이라는 응어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용서를 그저 “미움한테 방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야”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미움은 방 한 칸에 만족하지 않는다. 미움은 잠 못 드는 밤, 나의 마음의 방 한 켠에서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을 활보한다. 손님 방 한 켠에 있을 줄 알았던 녀석이 어느새 거실을 지나 안방에 있는 주인 ‘사랑’을 몰아내고 주인 자리를 차지한다.
5. 용서는 어렵다. 그러나 어렵지 않다. ‘용서하기’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손 안에 있는 일’이고,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서해야’만 삶을 살 수 있기에 용서는 할 만한(해야만 하는) 일이다. 용서는 내가 내 삶을 살아가기 위해 미움을 지우는 일이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대상에 얽매여 복수의 칼날만 가는 인생은 ‘나의 인생’이 아니다. 용서란 나에게 잘못한 상대를 위한 일이기 이전에 나를 위한, 내 삶을 위한 일인 것이다.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 부러 몸을 끌어 미움이라는 녀석을 마음의 방에서 몰아내야만 한다. 이것이 용서다. 이제 더 이상 ‘너’에 얽매이지 않고, ‘나’로 살아가겠다는 용기와 마음가짐.
6. 아무래도 나를 끔찍히도 예뻐하는 할머니가 우리 엄마를 미워하지 않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가부장제의 촘촘한 거미줄 안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대하고, 대화하는 방식에는 분명 많은 한계와 제약이 있었고 할머니의 미움도 그 한계 속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할머니의 미움에서 엄마는 힘들었고, 상처가 남았지만 그 미움으로 할머니도 마음이 병들었을 것이다. 미움의 불빛은 알츠하이머도 꺼트리지 못한다. 미움과 분노의 알츠하이머란 없는 것 같다. 기억은 사라져도 미움은 남는다. 추억은 희미해져도 원한은 남는다. 미움과 원한은 저절로 꺼지지 않는 불빛이다. 이다지도 강렬한, 꺼지지 않는 불빛이 기억이 아니라 미움이라는 사실이 절망적이기도 하다.
7. 그러나 우리에겐 용서라는 지우개가 있다. 용서는 상대를 향한 미움과 분노가 내 마음 한 켠을 차지하지 않도록 ‘지워버린다’. 오직 용서만이 미움과 분노를 지울 수 있는 유일한 알츠하이머, 지우개이다. 상대에 얽매이지 않고 나로 살 수 있는 용기, 용서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도 용서는 어렵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상처로 아픈데 왜 자꾸 용서가 쉽다고 말하냐’고 분노할 수 있겠다. 그렇게 미움이 무겁게 짓눌를 때, 그래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때, 상대를 향한 나의 미움과 분노가 절정에 다다를 때 오일남 할아버지의 명대사를 주문처럼 외워보자. “내가... 뭐라고 .. 했지?” 때론 어이없는 가벼움이 나를 지나친 무거움에서 놓아주기도 하는 법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