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호 Nov 06. 2024

자초지종

글쓰기 실패에 대한 경위서 

오늘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매일 자정이 되기 전에 글을 한 편씩 쓰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는 데, 늦게까지 긴 글을 쓰고 긴 글을 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나의 상황을 밝히고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글을 쓰는 방법 밖에 안 남았습니다. 


오늘은 아주 새벽부터 아주 바쁜 하루였습니다. 새벽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였고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바쁘게 업무를 보았습니다. 아주 이른 퇴근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시간에 집에 와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제시간에 글을 끝내지 못한 가장 큰 원인입니다. 


처음에 쓰려고 했던 글은 <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 가>란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가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요? 저는 호랑이 가죽이 무엇에 그리 쓸모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죽은 뒤에 이름이 남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 보니 무엇이 남는 것이겠지요. 저는 사람이 죽어서 굳이 무엇을 남긴다면 주변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는 오늘 나를 나의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지요. 이런 글을 쓰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이 가끔 쓰기 시작할 때의 의도와 다르게 혼자서 마구 질주를 할 때가 있습니다. 달리는 말에 고삐를 쥐었다고 생각했는 데 말이 말을 듣지 않고 내달리니 고삐에 내가 끌려가는 샘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참 글에 끌려가다가 정신을 차리니 글의 내용이 이미 저 멀리 산꼭대기에 와 있습니다. 기차를 잘 못 타고 밤 새 달려 낯선 지방에 다다른 느낌입니다. 이런 글들은 내가 썼지만 나의 생각이 아니기에 아쉽지만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아까와 이리저리 고쳐보려 하여도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오늘 저는 그렇게 쓴 긴 시간을 글을 고치다 허송하여 버렸습니다. 


오늘의 실패한 글쓰기는 또한 좋은 배움이 되었습니다. 너무 장황한 주제로 글을 시작하지 말 것. 생각이 무르익기 전에 글이 써지는 요행을 바라지 말 것. 글이 술술 쓰일 때는 그 내용이 정말 나의 생각인지 시시각각 돌아볼 것. 글의 방향이 잘 못 되었다면 미련을 가지지 말고 빨리 새로운 주제로 다시 쓸 것. 배움은 항상 후회에서 옵니다. 실패가 값진 이유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주사위 게임에 비유하였다지요. 주사위 게임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운입니다. 그러니 혹 실패하였더라도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니까요. 다시 용기를 내어 좋은 퍠가 나올 때까지 계속 주사위를 던지면 되는 겁니다. 오늘의 글쓰기의 실패도 그저 운이 없어 길을 잘못 들어섰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오늘의 실패를 훌훌 털고 내일 다시 새로운 글을 쓰면 되니까요. 누가 아나요 혹시 내일은 운수가 대통하여 시대의 명문이 탄생할지..   


날씨가 제법 추워졌습니다. 이제 겨울 코트를 꺼내 입어야 할 판입니다. 계절과 날씨는 시간이 흐름을 번뜩 일깨워줍니다. 시간이 지나는 것에 너무 호들갑을 떨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오늘 하루를 잘 살았는 지를 돌아보고 내일은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보자는 다짐은 잊지 않으려 합니다. 


모두 편안한 밤 보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굿나잇!   

매거진의 이전글 비둘기의 기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