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발견한 1992 현대문학상 수상집 <시인과 도둑>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글을 써서 기록했던 파피루스는 파피루스 잎으로 만든다. 파피루스는 3년마다 새로운 파피루스에 옮겨 적지 않으면 건조해진 파피루스가 부스러져 사라져 버린다. 종이가 발명되고, 인쇄술이 보편화된 이후부터 십여 년 전까지도 거의 모든 책은 산화지롤 만들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종이가 누렇게 변하고 삮아들어가기 시작한다. 내 서재 안의 책들도 하나같이 누렇게 변해버려 주인의 나이를 실감케 한다.
누렇게 변해버린 책들 사이로 1992년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을 발견했다. 그 해는 이문열의 <시인과 도둑>이 수상하였다. 이외에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이 보인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내가 이 소설집을 사서 첫 페이지에 남겼던 싸인도 보인다. 내가 지금도 쓰고 있는 한글, 영어, 한자가 조합된 싸인인데, 당시의 사인은 모두 정자로 바지런히 적어 왠지 지금의 싸인보다 더 순수하고 바르러 보인다.
책 사이에는 리플릿 한 장이 반으로 접혀 꽂혀있다. 2010년, LA한국교육원에서 열린 이문열 초청강연회의 리플릿이다. 회사 일로 미국에서 지내던 때 미주판 중앙일보에서 광고를 보고 이문열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8월 11일~13일 6시 30분. 3일에 걸쳐 <시대와 문학의 상상력>, <나의 삶, 나의 문학>, <우리 시대의 새로운 리바이던> 이란 주제로 강연이 이루어졌다. 나는 그의 강연이 어떠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문화원을 나오는 길목에서 작가를 기다렸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짧게 몇 마디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난다.
나의 오래전 메모는 더 많은 것을 남겼다.
"강단에 올라온 이문열 작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은 체구의 중년 아저씨였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예를 들며 문학적으로 심도 있는 설명을 해 나갔다.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학자적인 혹은 강단에 서서 이론을 이야기하는 이문열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가 학교에서 강연도 하고 중견 작가로 소설과 문학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해 오던 작가 이문열은 보다 무식하였다. 배움이 모자라다는 의미의 무식이 아니고 그런 이론 따위야 알리도 없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머릿속에 우글거리는 이야기들을 활어처럼 건져 올리는 작가였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내가 읽은 책들 중 '소년 소녀를 위한 문고판'을 벗어난 첫 번째 소설이었다. 나의 독서 습관은 한 작가의 책을 읽고 그 책이 마음에 들면 한동안 그 작가의 책들을 연이어 읽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실렸던 1987년 이상문학상 수상집 이후 <시인과 도둑>(현대문학상 수상집, 1992),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젊은 날의 초상>,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리고 10권의 <삼국지>까지 나는 한동안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었다. 나에게 이문열이란 "이 시대의 최고의 이야기꾼" 이상의 존재였다. 나는 이문열의 소설을 읽으며 자랐고 그의 소설 속 인간의 등 뒤에 유령처럼 서 있는 이문열이란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가 가진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에 경외심을 가졌다. 내가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게 된 것도 그의 소설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싶다는 바램에서였다.
이문열의 소설이 문단 안팎으로 주목을 받았을 때에 비하면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다. 2001년, 그는 한 신문에 기재한 글에서 '홍위병' 언급으로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렸고, 그의 책들이 그의 책을 읽었는지 아닌지도 모를 '독자'들로부터 화형식을 당했다. 2010년 내가 만난 이문열은 그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는 데 감정적인 싸움에 빠져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침묵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는 그가 회고하는 모습을 보며 소설 속 영웅이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스러져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당하게 파도를 온몸으로 맞는다. 꼿꼿이 서서 살과 뼈가 부스러져 사라지는 모습이 오버렙되었다.
소설은 이야기로 말하지만 누구도 이야기 세상 밖의 작가의 입을 막을 권리는 없다.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라 하여 모두 작가의 말에 공감하리란 법은 없다. 어쩌면 독자의 해석과 작가의 의미가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작가 이문열이 이 사회의 논쟁에 휩싸이고 그 안에서 부서지고 잊히며 이문열의 소설마저 존재의 기반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쉬이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란 말을 많이 한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소설은 독자적인 의미 체계로 세상에 던져져 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이문열은, 이문열의 소설과 분리되어 재평가되고 재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2010년 그의 강연 리플릿 뒤에 이문열 작가의 싸인이 적혀있다. 그에게 사인을 받았던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의 싸인은 모두 한자로 되어있다. '문열'이란 이름은 월북한 그의 부친이 열렬한 투사가 되어라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가 오랜 시간 그의 소설로 싸웠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미움받은 투사의 모습은 그의 진짜 모습이었던가 돌아보게 된다. 투사는 싸우다가 죽고 미움받고 잊힌다. 나는 그의 소설이 잊히는 것이 아쉬워 투사가 된 그가 원망스럽다. '어쩌다' 투사가 되어 적이 아닌 적과 싸웠던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