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에 집착하던 나의 전자책 사용기
i.
출장짐을 챙기다 보면 출장 기간이 길어질 수록 짐의 양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출장 기간이 일주일이 넘거나 그 보다 더 길어지면 짐의 양은 더 늘지 않고 비슷비슷하다. 긴 출장 중에 갈아 입을 옷을 모두 챙겨갈 수 없으니 도중에 빨래를 하거나 그도 귀찮으면 현지에서 사 입기 때문이다.
옷과는 달리 출장 기간에 비례하여 늘기만 하는 짐이 있다. 바로 책이다. 평소에 그다지 책과 친하게 지내지 않다가 출장 짐을 쌀 때면 어떤 책을 가지고 갈지 온갖 고민에 쌓인다. 긴 비행 시간에, 시차로 인한 잠 못 드는 밤에, 혹은 호텔 식당에서 모닝 커피를 홀짝이며 멋스럽게 책을 읽는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의 독서 취향은 그날의 기분과 주위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한 번에 두 세 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 시작하여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책을 골라 읽다보니 출장을 갈 때 가지고 갈 책을 고르는 일도 수월하지 않다. 출장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면 왠지 그동안 읽다가 쳐박아 놓은 책들이 불쑥 불쑥 눈 앞에 들어오고 책장의 책들이 답답한 서재에서 벗어나 외국에 가서 바람 좀 쐬어 보자며 서로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아우성이다. 서재를 통채로 들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 책을 고르느라 서재에서 한참 시간을 보낼 때가 허다하다.
출장 갈 때마다 책을 고르는 시간과 그 책들을 들고 다니는 에너지를 줄여 보고자 지난 가을 이북(전자책)리더기를 하나 장만했다. 디지털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제부터는 이 단말기 하나면 내 서재에 있는 책들을 통째로 넣고 다니며 언제라도 꺼내어 볼 수 있단다.
ii.
오랜 옛날 외국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던 한 학생이 그동안 읽은 책들을 배 한 가득 싣고 고향으로 돌아 오다가 풍랑을 만났다. 학생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배는 그만 바다 밑으로 가라 앉았고 그 배에 실려 있던 책들과 함께 그가 그 동안 배운 지식들도 깡그리 사라져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개연성 없는 이야기는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작자는 ‘지식은 책에 남는 것이 아니고 머리에 남기는 것이다’라는 교훈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 이사를 다닐 적마다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고 무거운 책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나에게 와이프가 하고 싶은 말이겠지. 내가 이사를 다니며 해외로까지 책들을 이고 다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어릴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이 우표를 모으는 것처럼 책을 모으는 것을 즐겼다. 당시는 책이 ‘지식의 보고’이자 ‘인생의 길잡이’라는 등 독서가 마치 성공에 이르는 만능열쇠처럼 여겨지고,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식자(識者)의 표시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다행히 당시 우리집은 살림이 넉넉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크고 작은 서점들을 들락거리며 적지 않은 책을 모을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 갈 때 즈음 나는 적지 않은 책들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주 커다란 서재를 만들어 그 안의 높은 책장들을 나의 책들로 채우리라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장 사이를 청소하는 일은 번거롭기 그지 없는 일이겠지만 널찍한 서재에서 바퀴가 달리 계단을 오르내리며 책을 꺼내는 상상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십대 초반, 내가 군대에 있던 중에 가계가 어려워졌다. 우리 식구가 살던 큰 집은 어느날 갑자기 마술처럼 줄어 들었다. 집 크기의 변화가 얼마나 극적이었는 지 얼마전 딸 아이들이 틀어 놓은 만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안에 엘리스의 몸이 갑자기 커져 머리가 천장에 닿고 허리도 바로 펼 수도 없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 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몇 번인가 이사를 다니는 사이, 오랫동안 모아 놓은 나의 소장품들은 ‘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동안 그 책들과 함께했던 나의 지식들도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그 책들이 아직 남아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애지중지 하던 책들이 사라지는 가슴 아픈 일을 겪은 후 나는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나의 책들을 몽땅 싸 들고 다닌다. 가끔 오래된 책들을 좀 버려볼까하고 생각해 보아도 이전에 나의 책들이 사라졌던 때의 허전함이 떠올라 엄두를 못낸다. 책이 뭐라고. 그저 짐이다. 나도 안다.
iii.
얼마전 전자책 리더기를 구입하였다. 막상 써 보니 편리하기 그지없다. 인터넷 서점의 정액제 프로그램은 한달에 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수 백 권의 책을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다. 내가 여기저기 책을 늘어 놓는 것이 불만이던 와이프는 이제 책이 더 이상 늘지 않겠다며 좋아했다. 미니멀 라이프(반드시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 생활스타일)이 대세라는 데 나도 거북이 등껍데기 같이 이고 다니는 책들을 좀 덜어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인가 하였지만 나는 집이 더 이상 책으로 좁아지지는 않을 것이란 와이프의 기대를 뒤로 하고, 다시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종이책을 계속 읽고 모으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여전히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너무나 좋아해서다. 나는 활자가 인쇄된 종이들의 묶음이며 여덟개의 반듯한 모서리를 지닌 이 직육면체의 물건이 좋다. 책은 무거운 물건을 위에 올려 놓아도 거뜬히 버텨내는 단단함과 펼치면 한 장 한 장 부드럽게 넘어가는 유연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반전의 매력이다.
더 좋은 것은 이 물건을 손에 들고 있으면 왠지 그 안에 담긴 지식들도 소유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점이다. 지식이나 지혜라는 것들은 손에 잡히거나 무게가 느껴지지 않지만 그것들이 담겨있는 책을 들어 올려 보면 그 묵직한 무게감 때문에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묵직함이 종종 무기로 쓰이기도 하지만.
책이 모여 있는 서재는 나에게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생각하는 공간이다. 머릿속에 어떤 문제의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거나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책장 앞에 서서 책들을 제목들을 휘 둘러 본다. 가끔 내가 읽었다는 사실까지도 까마득히 잊혀졌던 책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책들을 후루룩 넘기면 중간 중간 밑줄을 그었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 오며 잊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돌아온다. 책장의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책들의 제목과 그 내용의 흐릿한 기억들이 연결 지어지며 해답을 찾을 때가 적지 않다.
서재와 종이책의 효용은 이번에 글쓰기를 시작하며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책장 앞에 서서 이 책 저 책을 꺼내 읽고 최근에 관심이 있었던 내용과 연관된 관한 자료들을 뒤지고 있으면 글감이 떠오를 때가 있다. 또 꼭 글감이 아니어도 책들을 뒤지는 사이에 글을 쓰고 싶어질 때가 많다. 글쓰는 사람은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想量)하여야 한다는 데 나에게는 읽은 후에 서재에 꽂히어 언제라도 회상의 단초가 되어 줄 종이책이 필요하다.
iv.
종이로 된 책을 읽는 오랜 습관과 책장에 꽂혀진 책들에서 영감을 얻는 종이책의 효용성 탓에 나의 ‘디지털 독서로의 대전환’은 무산되었지만 전자책은 여전히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의 경우에 해당하는 주관적인 활용법이다.)
1) 전자책은 구지 소장이 필요없는 책, 예를 들면 단순한 지식을 얻는 책들을 친환경적으로 또 저렴하게 볼 수 있다. (지식은 책이 아닌 머리에 담자)
2) 돈 주고 사 보기에 효용이 확실하지 않은 책, 제목은 아주 매혹적인 데 내용과 수준이 확인되지 않은 책들은 전자책 보기 프로그램(북클럽 등)으로 볼 수 있다.
3) 무제한 리스트에 있는 책들 중 보고 싶었던 혹은 소장하고 싶은 책이 생기면 우선 전자책으로 보고 나서 구입과 소장을 판단할 수 있다.
4) 여행 중에 짐을 줄인다. 여러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5) 어두운 곳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 (자체 발광 기능) 자기 전 혹은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기에 최적이다.
6) 들고 다니기 두꺼운 좋은 책들 (레오달리오의 <원칙>과 같은) 책들은 전자책과 소장을 병행한다. 물론 한가할 때에는 종이책을 몇 일 안에 집중해서 읽는 편이 낫다.
7) 아무래도 집중이 되지 않는 데 진도를 뽑고 싶을 때는 리더기의 ‘읽기기능’을 이용한다. 기계음이라 조금 어색하지만 오디오 북처럼 눈을 감고도 들을 수 있다.
8) 아마존 킨들은 paper 모델부터 방수 기능이 있어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읽을 수 있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아직 방수 기능의 리더기가 출시되지 않았다.)
9) 전자책을 읽는 속도가 종이책 보다 더 빠르다. (아마도 이것은 매체에 따른 정보 습득 습관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10) 해외에서도 해외 배송 주문을 하지 않고도 보고 싶은 책들을 쉽게 찾아 저렴하게 읽을 수 있다.
11) 좀 있어 보인다 (나 디지털에 익숙한 트렌디한 사람이야)
추기 : 출장 때마다 두세 권 씩 책을 들고 가지만 대부분은 비행기에서 한두 페이지를 펼쳐보다 골아 떨어지는 게 전부이다. 매번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출장 때마다 가방에 책을 쑤셔 넣고 그것도 모자라 공항 서점에서 책을 사 들고 비행기를 타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활자 중독’이란 개념에 나의 행동을 끼워 맞출 수 밖에 없다. 인쇄된 활자를 들고 다니고 가까이 두고 잠을 자며 계속하여 사 모으면 스스로 똑똑해진다는 믿음은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변형된 활자 중독의 한 증상이다. 사전을 씹어 먹으면 그 안의 단어를 외우게 된다는 전설의 영어학습법과 맥을 같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