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의 봄 / 2020년3월
어제는 처할머니의 7회기(回忌, 돌아가신지 7년되는 해의 제사)를 치루기 위하여 절에 들렀다. 집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명광사(明光寺)라는 절인데, 우리집에서 이정도 떨어진 곳이면 제법 시골이다.
교차로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데 신호등 위에 적힌 동네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밭 전(田, ta). 한 음절(ta)로 이루어진 심플하며 명료한 이름이다. 둘러보니 정말 온통 밭 밖에 안보인다. 누군가 ‘인간’이나 ‘사람’이란 이름을 가졌다면 그 ‘인간‘이란 어떤 인간일지 유심히 쳐다보게 되겠지만 밭이란 보아도 보아도 심심할 따름이라 잽싸게 ‘밭’ 마을을 빠져 나왔다.
산 기슭에 자리한 절에 다달으니 군데 군데 벛꽃이 피었다. 일본기상주식회사(註1)에서 발표한 일본의 벛꽃 개화 예보에 따르면 후쿠오카 지역에 벛꽃이 피는 시기가 3월 20일이었으니 올해의 개화는 예상보다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모양이다. 나의 아내는 꽃가루가 가져다준 콧물과 눈물로 봄을 알아채고 어떤 친구는 거리를 지나는 여자들의 옷차림에서 여름을, 술 상에 오르는 전어로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린다. 나의 경우에는 냄새로 겨울이 왔다는 것을 느낀다. 이른 아침 문을 나서면 바람을 타고 전해오는 나의 ‘겨울 냄새’는 아마도 켜켜히 쌓인 낙옆이 지긋이 섞어가는 냄새가 아닌가 싶다.
일본의 불교식 제사는 불상 앞에 고인의 사진 등을 올려놓고 불경을 읽는 것이다. 그게 다이다. ‘홍동백서, 어동육서’ 등등 하며 상을 거하게 차리고 멀리서 찾아 오신 조상들을 배부르게 대접해야 한다는 우리의 유교식 제사를 생각하면 일본식 제사는 간소하다 못해 야박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일본인들은 집 안에 조상의 영전이나 불단을 모시고 산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우리처럼 조상들이 멀리서 고생스럽게 찾아온다는 느낌이 없고 때문에 제사가 간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가끔 들르는 친척의 대접에 비하면 가까이 사는 가족들의 대접이 오히려 건성인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만 그런가)
제사를 마치고 법당을 나오니 맞은 편에 서있는 오래된 벛꽃 나무가 눈에 들어 왔다. 수령(樹齡)이 몇 년쯤 되었을까. 일본에는 산이 많은 만큼(註2) 오래된 나무들도 수두룩하다. 구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히메>의 배경이 되었던 조몽스기(縄文杉)(註3)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몇 백 년이 넘은 고목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절 앞에 서 있는 백 년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싶은 ‘어린’ 벛꽃 나무는 가지에 달린 꽃망울을 막 터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봄이 왔구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註4) 봄이 왔지만 마음은 봄 같지 않다는 말이다. 봄은 아무런 약속도 한 적이 없는 데 우리는 봄에 무엇을 그리 기대하였었나. 봄이 오면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던 말, 가까운 데 여행 한번 다녀오자고 했던 말, 날씨 풀리면 꽃을 보러 산에 오르자 했던 말들이 너무 빨리 빈 말이 되어 버린 봄의 초입이다.
註1) 일본기상주식회사는 오사카 1985 년 시작된 회사로 1993년 예보업무허가 사업자로 등록되었다. 일본에는 기상과 지진등과 관련하여 약 118개 회사(기상 71개, 지진 47개사)가 있으며 이들의 총 매출은 연 약 300억엔에 이른다. 이중 1호 예보업무허가 사업자는 상장기업인 이데아(IDEA)로 1953년 설립되었다. 재난이 일상과 떨어질 수 없는 나라이니 이를 예보하는 사업이 흥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註 2) 일본 국토의 67%가 산림이다. 핀란드, 스웨덴에 이어 선진국 중 3번째 (日산림청 자료 중)
註 3) 조몽스기(縄文杉)는 유네스코에 세계 자연 유산으로 지정된 야쿠시마(屋久島,가고시마현)에 소재한 삼나무의 이름이다. 이 섬에 1000년이 넘은 삼나무를 일컫는 야쿠스기(屋久杉) 중 최고 수령을 지닌 나무로 높이 30미터, 둘레 43미터, 수령이 3000년에서 7500년으로 추정된다. 섬 한 가운데 있는 이 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10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이 섬은 하야오감독의 <바람의 계곡 나오시카>에 나오는 지구를 정화하는 ‘부해의 숲(腐海の森)’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註4)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쓴 ‘소군원삼수(昭君怨三首)’의 한 구절. 나라의 화평을 위하여 흉노의 나라에 보내지는 궁녀 왕소군의 마음을 읊은 시. 이백(태백)의 시라 회자되나 잘못된 출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