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선박 한 척으로
‘수송 제국’ 일군 선장
장룽파
중고 화물선 한 척으로 글로벌 수송 제국을 일군 대만(臺灣) 에버그린그룹(長榮集團)의 창업주 장룽파(張榮發)가 2016년 1월 20일 타계했다. 향년 88세.
선장 출신의 장룽파는 1968년 자신이 직접 해운사를 세워 에버그린을 해운, 항공, 숙박을 아우르는 기업집단으로 키웠다.
그는 대만에서 한진의 창업주 조중훈과 비슷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에버그린 그룹은 현재 세계 4위의 해운사인 에버그린 해운을 비롯해 대만의 첫 민항사인 에바항공, 에버그린 호텔 등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2월 한진해운이 파산할 때도 에버그린 해운은 건재했다.
장룽파는 2012년 2월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11년 장룽파의 재산을 500억 대만 달러(약 1조 8000억 원)로 추산했다. 그는 1985년 재단법인 장룽파기금회를 설립해 사회사업을 시작했고 자신의 재산을 이 재단에 맡기기로 했다.
대만 에버그린그룹 창업주 장룽파. (출처 : 홍콩 넥스트매거진)대만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다
장룽파는 1927년 10월 일제 강점기 당시 타이완 북동부의 작은 항구 쑤아오(蘇澳)에서 태어났다. 타이베이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해운사의 타이베이사무소에 들어갔다. 밤에는 직업학교에 다니며 주경야독을 이어갔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현지 해운사에 3등 항해사로 입사했다. 그는 해외로 부지런히 화물을 실어 날랐고 선장 자리에 올랐다. 1961년 지인들과 함께 해운회사를 설립하고 해운 경영에 처음 뛰어들었다. 이어 1968년 9월 선령(船齡) 20년을 넘긴 1만 5000t급 중고 화물선 ‘센트럴 트러스트’를 구입해 자신의 회사인 에버그린 해운을 출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대만의 대표 항구인 기륭(基隆)항은 크게 파손됐다. 1950년대에 들어서도 대만은 수출 제품이 많지 않았다. 장룽파가 해운사를 설립하기 이전까지 대만에서는 해운업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대신 미국과 대만의 무역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운송 일감이 늘었다. 석탄, 가스, 석유, 반조립 전자제품 등이 대만에 물밀듯 들어왔다. 1960년대는 대만 경제의 황금기로 꼽힌다. 1960~1973년 공업은 연평균 17%, 농업 4.2%, 무역 25%씩 성장했다.
이런 업계 분위기에서도 장룽파는 '고객과의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적자를 감수하며 거의 빈 배를 운항할 정도로 운항 약속을 꼭 지켰다. 대신 고객에게 신뢰를 쌓았다. '신뢰의 힘'은 그가 창업 4년 만에 선박을 12대까지 늘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에버그린해운의 1호 선박 '센트럴 트러스트' (출처 : 에버그린그룹 웹사이트)'변화의 흐름'을 읽는 동물적인 감각
그는 거시적인 변화를 읽는 촉을 지녔다. 전 세계 화물선이 대부분 컨테이너 선박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견했다. 화물을 일정 규격의 철제 컨테이너에 채운 뒤 컨테이너를 통째로 옮기는 방식은 화물 선적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컨테이너 시스템은 전체 운송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인다.
사실 1956년 4월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항에서 첫 컨테이너 선박이 출항한 이후 세계 해운업계는 컨테이너 선박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장룽파는 2005년 언론 인터뷰에서 “초창기부터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컨테이너의 물결’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움직임은 읽었다”며 “일반 화물선을 사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컨테이너 선박 4척을 주문했다. 이런 주문의 변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에버그린은 없었다”고 말했다.
에버그린해운은 1975년 대만과 미국 동부를 잇는 노선을 운항하다 15개월 이후에는 서부까지 영역을 넓혔다. 승승장구했다. 당시 전 세계 해운업계는 여러 해운회사들끼리 몇 개의 크고 작은 동맹을 맺으며 일감을 공유하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해 신생 해운사가 쉽게 끼어들지 못하게 막았다. 다행스럽게 미국에선 해운 동맹 시스템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약하게 작동했다. 독립 해운사들이 그나마 도전장을 내도 일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에버그린해운도 그런 독립 해운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유럽은 미국과 달랐다. 배타적인 유럽의 해운동맹이 매우 강력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화물의 운송은 다국적 카르텔인 극동화물동맹(FEFC)이 장악했다. 이 카르텔은 1879년 설립됐을 정도로 뿌리가 매우 깊다. 배를 빌리는 화주(화물의 주인)들도 FEFC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였다.
만일 화주들이 독립 해운사의 배를 한번 이용하면 그 다음에는 FEFC가 자신들의 배를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화주들은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독립 해운사들을 멀리하고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FEFC의 선박을 이용해야만 했다. 카르텔에 도전하는 아웃사이더에게는 가혹한 벌칙이 내려졌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악수하는 에버그린그룹 창업주 장룽파. 1993년 6월 촬영. (출처 : 에버그린그룹 웹사이트)“비즈니스는 결국 두 사람의 문제”
에버그린해운은 해운동맹의 힘을 빌리지 않고 1979년 유럽에 처음 진출했다. 장룽파는 가격 단합을 위한 해운동맹의 행동에 대해 오랫동안 반대해왔다. 또 점차 시간이 지나면 해운동맹이 붕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신 직접 화주들을 찾아가 일감을 달라고 설득하기로 했다.
그는 1980년 프랑스 파리 리츠호텔 카페에서 타이어제작회사인 미쉘린의 운송 담당자를 만났다. 장장 4시간 동안 미쉘린 담당자와 눈을 마주치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화주에게는 해운사가 아무리 저렴한 운임을 제시해도 계약을 맺은 해운사의 파산 등으로 운항이 어려워지면 낭패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독립 해운사의 배를 이용한 게 드러나면 FEFC의 배를 빌릴 수도 없다. 고객은 먼저 운항의 지속성을 요구했다.
장룽파는 “우리는 고객과 하나”라며 인간적인 설득을 이어갔다. 자신은 고객과의 약속을 가장 중시하며 빈 배를 운항한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고객은 ‘두려워 말라’는 장룽파의 설득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이후 에버그린해운은 미쉘린의 일감을 맡을 수 있었다.
장룽파는 유럽의 화주들과 담판을 이어가며 에버그린해운이 유럽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굵직한 여러 화주들을 직접 찾으며 해운동맹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장룽파는 저렴한 운임 이외에도 차별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저렴한 중고 선박 대신 ‘신상’ 선박을 구매했다. 그의 과도한 선박 투자가 한 때 기업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신형 선박은 독립 해운회사에 대한 고객의 신뢰도를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에버그린 해운은 해운동맹에 당차게 도전하며 성장했고 1980년대 세계 최대 컨테이너 해운사에 올랐다. 현재 150대 이상의 선박을 보유하며 80개국, 240곳 이상을 취항하고 있다.
장룽파는 1989년 대만의 첫 민영 항공사인 에바항공을 세워 항공업에도 진출했다. 에버그린그룹은 중공업, 항공, 호텔, 리조트 등을 아우르는 3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 220곳에 사무실을 운영하며 2만 70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세계를 누비는 에버그린해운의 컨테이너선. (출처 : 에버그린그룹 웹사이트)전 재산 사회에 환원
장룽파는 일찌감치 ‘부의 사회 환원’을 주장해왔다. 그는 평소 “다음 세대에게는 더 좋은 세상을 남겨야 한다”며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손을 좀 더 자주 잡아줄 수 있다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 것이다. 이를 위해 내 재산을 사회로 되돌린다”고 말해왔다.
그는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장룽파기금회를 세웠고 이 재단을 통해 의료, 교육, 문화 분야에 대한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장룽파는 부의 사회 환원 등의 기여 등을 인정 받아 여러 단체에서 공로상을 받았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등 6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고 화물선 한 척의 기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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