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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Apr 26. 2021

내가 있을 곳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노래를 불렀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음악과에 입학한 후 좋은 교수와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그리고 한 학기 후 자퇴했다. 가계가 어려운 시기였다. 4년제 대학도 비싼 예체능 학비도 전부 사치인 듯 느껴졌다. 스무 살 봄, 친구들과 수업을 듣고 학식을 먹던 나는 그해 가을 동대문 야간 매장에서 장부를 적었다.


스물셋이 되기 이전까지의 그 틈새, 이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그 마른 틈 속의 나는 동대문 소매와 도매 시장을 전전했고 엑셀의 썸도 긁을 줄 모른 채 어학원 사무직에 들어가 커피를 탔고 명동 인테리어 매장에서 텃세에 치이며 바코드를 찍었다. 그냥 그런 시절이었다. 딱히 스스로가 불행하다는 생각 들지 않았지만 발목까지 찰박대는 음울함을 걷어낼 수 없던 시절. 누구나 한 번은 마주한다는 하향선의 날들.


-


본부 이동을 고민하는 남편이 말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옮겨야겠다 마음먹고 나니 갑자기 지금 있는 곳의 장점들이 막 아쉬워지는 거."

그래. 너무 잘 알지.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질릴 만큼 질렸다 생각해도 막상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린다 생각하면 내가 손해 보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한번 더 긍정적인 부분을 고려해보게 된다.  


나는 그와 침대에 마주 보고 누워서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했다.


-


동대문 두산타워 여성복 매장에서 새벽 직원으로 일할 때였다. 한가해지는 시간을 파악한 이후로는 새벽 두 시부터 퇴근까지의 서너 시간, 간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살 돈이 없어 당시에 흔하던 올빼미 간판 비디오방 같은 곳에서 일주일에 한 두 권을 빌려왔다. 비디오와 만화책들 사이에 스무 권 정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같은 책을 꽂아두는 매장이었다. 책들은 커다란 가방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새벽 두 시가 지나서야 매장 카운터 위로 올라왔다. 그러면 나는 습관처럼 다방 커피를 타왔다.


손님의 외모가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사십대로 추정되는 왜소한 여자였다. 아주 한적한 시간이었고 조용히 몇 벌의 옷을 골라 별 다른 말도 없이 계산을 했는데, 왜인지 봉투를 받아들고도 가질 않았다. 그리곤 난데없이 물었다.

"아가씨가 읽는 책이에요?"

손님이 가리키는 곳에는 거의 다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뒤집혀 있었다. 혹시 사장님 지인인가, 괜한 제발 저림에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녀는 몇 가지를 더 물었다. 나이가 몇 살이냐, 언제부터 여기에서 일을 했냐, 면접 같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나는 간단히 대답했고 다른 것을 되묻지 않았다.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가씨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

친구에게 인사를 하듯 손인사를 하고 가는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점쟁이야 뭐야..' 생각했다.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남은 커피 몇 방울을 털어놓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펼쳐 들었는데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그리고는 엉엉 울어버렸다. 옆 가게 언니가 '막둥이 무슨일이야' 하며 뛰어왔다. 언니의 예쁜 단발머리가 습한 눈 사이로 찰랑였다.


얼마 후 사장님에게 일을 그만두겠다 말했다. 사장님은 웃으며 '그래 수연씨는 우리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고 대답했다. 너 일을 참 못하더라 하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일하는 동안에도 '수연씨, 음악에 대한 책이야.' 하며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사다 주던 사람이었다. '사장님, 이거 미술에 대한 책인 것 같은데요' 하면 어이쿠 그렇군 하며 허허 웃던 사람. 내가 그들의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사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얼마 후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함과 동시에 입시 준비 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 나는 다시 음악 전공자가 되었다.


-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막상 일을 그만두려니 고민이 되더라."

정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운명 같은 사건이었는데도 그 당시에는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닌가 헛바람이 들어간 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뭐든 때려치우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이 말했다.

"근데 있잖아, 오늘 한 얘기 글로 쓰자."

"..."


그래서 썼다. 지난밤의 이야기.

나는 오랜만에 추억에 잠겼고 본부 이동은 뭐, 남편이 알아서 할 테니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그만이련다.


내 할 일은 쓰고 듣고 부르고 가르치는 일. 다행히도 지금 나는 제법 나다운 자리에 있다. 오랜만에 되짚어본 추억에 새삼 깨달아졌다. 그 밤, 나는 안도를 품고 아주 기분 좋은 잠을 잤다. 옅은 꿈속의 나는 사십 대의 키 작은 여자가 되어 동대문 어느 매장을 찾아간 것 같기도, '아가씨,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자리를 만나길 바라' 손을 흔들었던 것도 같다. 나인 듯 하지만 내가 아닌 여자가 되어 앳된 나를 만나는 꿈. 애잔함없이 기분 좋은 꿈이었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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