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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 Oct 19. 2022

정직한 자일리톨

핀란드 대중교통 공포증



새하얀 눈이 쌓인 겨울이었다. 집에 가려고 거리를 걸었다. 추웠다. 원래 버스를 잘 타진 않지만,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기 귀찮아 버스를 타기로 한다. 버스에 타서 어떤 승객들이 있나 살펴봤다. 술 취한 남자가 한 명 보였다. 혹시 저 사람이 해코지는 하지 않겠지. 내리는 문 가까이에 앉았다. 나의 1차 방어막인 이어폰을 꽂고 어두운 바깥을 바라봤다. 그때 그 남자가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나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뭐지?’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걸어서 나에게 올 정도로 급한 일이 있을까?’


술 취한 남자: (뭐라고 하는 것 같다)

나: (이어폰을 뺀다)

술 취한 남자: “오늘 밤에 뭐해?”

나: 그걸 왜 묻는데?

술 취한 남자: 오늘 저녁에 뭐 하냐니까, 계획 없어?

나: 그건 니가 알 바 아니니까 말 걸지 말아 줄래?

술 취한 남자: (더 가까이 다가온다)

나: (흠칫한다.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렇게 한 두 번 실랑이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기사 가까이 자리를 옮겼고 술 취한 남자를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인사불성인 사람이 취할 다음 움직임을 알 수 없어 공포에 바들바들 떨었다. 최대한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척 남편 라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 말하기 싫으니까 말 걸지 말아 줄래?

술 취한 남자: 오늘 뭐하냐니까?

나: 계속 말 걸면 경찰 부를 거야. 꺼져줄래?

술 취한 남자: (술 취한 채로 계속 얼버무린다)


그래도 술 취한 남자는 끈질기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112를 누르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다. 어떤 한 여자가 꽥 꽥 소리를 지른다. 핀란드어를 유창하게 하지 않아서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는 일을 저지하지 않은 버스 기사 아저씨, 다른 승객들을 미워하기보다 정직하게 바른말을 한 그 여자분을 잊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올바르게 이야기해줘서 정말 고맙다. 나를 도와준 여자분을 보고 용기가 생겼다. 나도 소리치는 사람이 되겠다.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하면 ‘누군가가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나서서 도울 거다. 


사실 핀란드 여자가 버스에서 소리치는 게 부러웠다. 꽉 막힌 내 속이 뻥 뚫렸다. '나는 왜 크게 소리를 못 내지?', '나는 왜 싫다고 소리치지 못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모임 친구에게 물어봤다. 우리 둘 의견견의 공통점은 소리 내기 쉽지 않다는 것. 나도 위험한 상황에 소리치지 못하는 내가 안쓰러웠다. '여자는 크게 소리 내면 안 되지.' 여자가 목소리를 내면 '조용히 해.', '얌전하지 못하게 말이야', 이런 판단이 붙는다. 바른 소리를 하면 조신하지 못하다고 그러거나 어린 게 어디서라고 한다. 나도 소리 내는 게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소리를 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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