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화폐와 수령
북한 당국이 공표한 화폐교환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국가기관, 기업소, 정당, 사회단체 및 소비조합 : 보유 현금 전액을 예금시키게 하고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 결정한 한도 내에서 1947년 12월 13일부터 지불
2. 1세대 단위로 세대주는 500원, 만 18세 이상의 동거가족 1인은 200원까지 교환
3. 국영 직장(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및 각종 기업소)에 근무하는 사무원과 노동자 및 생활상 국가보조를 받는 자들은 1947년 11월 봉급과 동액까지 교환(가족 제외)
4. 노동자, 사무원 10명 이상을 고용하는 민간기업소 및 민간단체의 교환액 : 1947년 11월 지불 임금의50%를 넘지 못함
5. 노동자, 사무원 10명 이하를 고용하는 민간기업가, 수공업자, 소상인 및 자유직업자 : 사업소득세 또는 자유소득세의 과세표준액 1개월분의 반액까지 교환
6. 농민 : 현물세를 납부한 농가에 한하여 매 호당 700원까지 교환
7.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 : 500원씩 교환
8. 전문학교 학생 및 대학생 : 1개월 국가장학금 지급액
※ 출처 : 리원경, 『사회주의 화폐제도』(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6), p. 275에서 발췌 요약.
화폐개혁의 의도가 선언적 수사(修辭)에만 있는 것이 아님은 세부적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신ㆍ구화폐의 교환비율은 1:1로 결정되었으나 직업과 소유 형태에 따라 교환 한도에 차별을 두었다.
“이번에 진행하는 화페교환에서 새 화페와 낡은 화페의 교환비률은 1대 1로 규정하였습니다. 화페교환 한도는 로동자, 농민, 사무원, 기관, 기업소, 단체별로 서로 다르게 규정하였습니다.” 김일성, “화페개혁을 실시할 데 대하여”(1947.12.1), 『김일성저작집 3』(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p. 520.
1947년 12월 12일까지 교환하지 않거나 예금하지 않은 화폐는 무효화되었다. 교환 한도를 초과하는 돈을 사실상 몰수한 것이다. 적대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켜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더불어 김일성은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다져 나갔다. 화폐개혁의 결과 북한 주민들이 회부한 구화폐 71억 2,271만 4,000엔 중 35%만이 교환되었다. 65%인 46억 1,471만 3,000엔은 동결되었고 그만큼의 몰수를 의미했다.
※ 주 : 상공업자 Ⅰ은 10명 이상의 노동자 사무원을 고용하는 경우, 상공업자 Ⅱ는 10명 이하를 고용하는 경우, 기타는 분류 외 주민 집단임
※ 출처 : 전현수, “1947년 12월 북한의 화폐개혁”, 『역사와 현실』(한국역사연구회, 1996), p. 207의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
주민들의 대응에 온도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노동자ㆍ사무원, 농민 등 근로계층은 화폐개혁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회부한 구화폐의 70% 내외를 신화폐로 교환받은 그들이야말로 화폐개혁의 수혜자라 할 수 있었다.
화폐개혁으로 크게 손실을 본 주민 집단은 10명 이상의 노동자 사무원을 고용하던 상공업자와 종교인이었다. 상공업자 Ⅰ(10명 이상 노동자 사무원 고용)은 회부한 구화폐의 21%만 교환할 수 있었고 79%가 사실상의 몰수인 동결 처분을 받았다. 상인들은 화폐교환에 매우 비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보유한 화폐를 실물로 전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격 담합을 통해 물가폭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노동자들은 노동법령을, 농민들은 토지를 획득했지만 우리들은 무엇을 획득했는가. 우리는 모두 끝장이다”는 비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또한 일부 유산 계층과 교회 목사들은 화폐개혁을 보이코트하라는 호소문을 살포하거나 화폐개혁 지지 집회를 결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 주둔 하에서 유산 계층의 영향력은 너무도 미약했다.” 이영훈, “북한의 화폐경제: 이행과 변화전망”, 『통일정책연구』15권 1호(통일연구원, 2006), pp. 112~113.
한편, 유산 계층과 종교인들도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특히 종교인들은 회부한 구화폐의 92%가 동결되어 화폐개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개신교 목사와 장로들은 화폐교환 보이콧을 선동하는 전단 살포와 집단적 거부 움직임을 조직했다. 일제 강점기 북한 지역은 개신교 교세가 강성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주로 유산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해방 이후 토지개혁을 필두로 전개된 일련의 민주개혁으로 입지가 급속히 축소되고 있었다. 화폐개혁은 마지막으로 남은 경제적 기반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화폐개혁 직후 김일성은 상인과 개신교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모리간상배들과 악질적 장로, 목사들에 대하여 경각성을 높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작년 12월 화폐교환에서 손해를 본 사람은 로동자, 농민, 사무원들 가운데는 없습니다. 다만 모리간상배들만이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은 여기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 김일성, “모든 힘을 민주 기지의 강화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위하여(1948.3.29)”, 『김일성저작집 4』(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p.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