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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수 Mar 23. 2024

닫힌 문

평범한 직장인 P는 오늘도 화장실에 숨어 월급 소도둑질을 한다.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니 이건 합당한 휴식이라는 마음속 핑계도 빼먹지 않는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곳, P는 거기서 안락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좀 우스웠지만 칸 하나를 차지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이 순간이 평일 9시부터 18시에 주어진 가장 큰 행복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화장실 안에 들어서면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았다. 설마 여기서 뻐기지 말라고 무슨 수를 쓴 건가. P는 이런 시시껄렁한 생각도 해보았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P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첩이나 이전에 써둔 메모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 P는 돌아가기 싫은 마음을 뒤로하고 칸 밖으로 나왔다. 너무 오래 있으면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돌아가 쳐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손을 씻고 있는데 화장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불투명한 유리문 앞에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들어올 건가 싶어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문은 열리는 대신 소리를 내었다.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마세요.


말을 마친 바깥의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곧바로 사라졌다. P는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갑자기 나오지 말라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P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서기 위해 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려고 하니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났나? P는 뒷주머니에 꽂아둔 휴대전화를 꺼내어 사파리에 접속했다. 창은 로드되지 않고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뿐이었다. 그제야 P는 화장실이 전화가 잘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잡고 있던 문 손잡이가 뜨끈해졌을 때쯤, P는 문을 쉽게 열 수 없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냥 나가면 되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한 말에 왜 이러고 있는 거람? P는 다시 한번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면? P의 마음 깊은 한 구석이 이를 낚아채었다. 밖은 정말 위험한 상황이고, 아까 그 사람이 마지막 남은 인류애로 나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밖으로 나오면 안 될 일이 뭐가 있지? 지진은 내가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으니 아닌 것 같고...

...

그럼 혹시 묻지 마 살인 같은 거라도 벌어진 건가? P의 상상이 여기저기 흘러 다니다 멈춰 섰다. P는 조심스럽게 문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만약 그런 거라면... 언제든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날 죽여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엄습해 오는 공포에 발을 동동 구르던 P는 다시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잠그고, 변기 뚜껑을 덮어 위로 올라갔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발 밑을 들여다보는 살인마들을 피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늘 하던 것이었다. P는 다시 휴대전화를 열어 전화가 터지는지 확인했다. 여전히 먹통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한 시간 가까이 흘러있었다. 자신을 찾는 연락도 오지 않고, 바깥도 조용했다. 살인이든 뭐든 큰일이 났으면 소란스러워야 할 텐데, 그냥 나가볼까? P의 머릿속은 나가느냐 남느냐로 뜨거운 논쟁에 휩싸였다. 근데 정말 그냥 나갔다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P의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의 죽음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씨 오늘 택배 온다고 했는데... 눈을 감는 순간 오늘 도착예정인 신상 봄옷이 떠올랐다. 프리오더로 한 달 기다린 건데... P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죽기 전에 못 이룬 꿈이 생각나긴 개뿔, 아직 못 가본 맛집, 못 입어본 옷, 끊어둔 해외여행 티켓만이 생각났다. 역설적이게도 P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동시에 허기를 느꼈다. 얼마 전에 먹었던 정말 맛있는 매운 수제비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먹기 위해 사는 P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서 굶어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한참을 싸우던 P의 머릿속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바깥으로 나가보기로 극적 합의를 보았다. P는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유사시 휴대전화는 훌륭한 무기가 되는 법, P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칸의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정적을 가르며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너무 늦은 결심이었나... P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실제로 화장실에서 손 씻다 떠오른 것으로 써보았다.

예전에 모죠의 일지에서 모죠가 대학생이던 시절에 쓴 레포트를

방구레포트라고 일컫는 내용이 있었다.

알맹이는 없고 잔뜩 부풀려 쓴 그런 뉘앙스였는데...

그때 아무생각없이 만화를 보며 깔깔거렸는데 난 이걸 오늘부터 방구소설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다.

일주일에 글 한 편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다니 그치만 쓰고 나서 모아보면 뿌듯한 바로 이것

잘 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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