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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05. 2021

어두컴컴한 속내를 감추고 산다

#20 검은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건들거리는 걸음이 영 수상쩍다. 내 꿈은 한 남자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한쪽에 치우쳤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걷고 있다. 골목길을 따라 어딘가로 향하는 이 남자는 형사나 건달쯤으로 보인다. 누군지 고개를 틀어보니 얼굴이 까맣게 칠해있다. 누가 꿈 아니랄까봐. 그의 발걸음에는 극심한 피로와 함께 세상에 발을 딛길 주저하는 자 특유의 가벼움이 공존한다. 발끝만 살짝 대고는 까치발로 쉬쉬 미끄러져 간다. 어떤 내용도 없이 끝까지 어두운 새벽 골목길을 걷기만 하다 끝이 나는 이 꿈은 피로한 새벽에만 날 찾아온다. 도대체 무엇이 날 이런 꿈으로 이끌었는지 딱히 이유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저승에서 프로이트를 만나면 물어볼 테지만, 그는 아마도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골목길에 세워진 가로등은 없었냐고 물을 것이다. 난 그저 이 꿈이 육체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극심한 외로움과 성욕이 빚어낸 찌꺼기 정도?


 어제 자정 즈음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먹었다. 커피도 하나 뽑아서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향했다. 새벽까지 글을 쓸 생각을 하니 부쩍 힘이 났다. 문을 열고 컴컴한 거실 스탠드를 켜고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돌렸다. 왓챠로 HBO 드라마 소프라노스를 켜고 무던히 먹을만한 밥알을 씹었다. 지질하기가 이를 데 없는 마피아의 일상은 내 삶 못지않게 애처롭다. 사람이나 죽이고 돌아다니는 저 작자도 잘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니 생계라는 것이 주는 일정량의 모욕감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밥을 다 먹어가던 중에 난 어느 순간 되새김질을 멈추고 말았다. 드라마 속 마피아 소프라노스는 사람을 죽이고 집에 들어와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곯아떨어지듯이 잠에 빠진다. 그는 새벽에 내 꿈과 거의 유사한 검은 뒷모습을 한 남자에 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 그거 내 꿈인데!' 그리고 이어지며 낯선 여성과 육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지나치게 딱딱한 쌀밥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내 고유한 꿈이 흔하디 흔한 드라마로 탈바꿈하니 기분이 불쾌했다. 의문으로 남았던 정체 모를 검은 남자의 뒷모습이 고작 드라마 속 마피아의 욕정이란 말인가. 바쁜 걸음으로 총총거리는 어두운 남자의 뒷모습은 그렇게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 텐데. 난 다시 어젯밤에 나타났던 검은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 남자를 그려보았다. 검은 양복에 머리를 살짝 뒤로 넘겼고, 양복이 아주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나로 상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잘빠져서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흔하지 않은 스타일을 가진 사내였다.


 내가 이 꿈을 자주 떠올리는 이유는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제스처와 감각 때문이다. 애매하고 희미한 데다 어쩔 땐 매캐하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뒤틀리고 훼손된 상태로 출몰해서 나를 멍하게 만든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장면이라면 글로 적거나 술자리에서 말로 다 털어버릴 텐데, 꿈은 그게 불가능하다. 언어가 제 기능이 도달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순간이다. 내용이 부재한 구석은 내가 지어내서 채우면 그만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으른 각색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다시 단서를 조합해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이렇다. 건들거리는 발걸음, 낮은 목소리에 꽤 건방진 말투. 자칫하면 누군가를 때려눕힐 폭력성. 난 언젠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한 편 써낼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처럼 분위기로 압살 하는 그런 소설 있지 않나.


 한때 경기도 어느 소도시에서 혼자 살았다. 그때 우연한 계기로 한 경찰과 친해졌다. 같은 독서 모임을 다녔는데 한 서너 번쯤 만나고 나서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땐 바로 경계심이 일었다. 켕기는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를 보면 피해 다녔다. 근데 그는 문학을 좋아하는 건실한 청년이었고, 난 그의 수줍은 말투가 마음에 들어 한 달 만에 부쩍 친해졌다. 늘 검은색 가죽 잠바를 입고 슬랙스에 구두처럼 보이기 위한 검정 단화를 신었다. 그는 가끔 술자리에서 유명한 조직폭력배를 쫓은 모험담을 떠벌였다. 살인 용의자를 마주한 순간의 긴박감도 생생하게 전달할 줄 아는 이야기꾼이었다. 평범한 내용도 그의 돋보이는 화술에 놀아나면 그럴싸한 장르 소설이 됐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런이 연출한 양궁 시합 같았다. 그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좋아하면서도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일본 추리소설은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왠지 내겐 마음에 드는 구석이었다.


 그가 내게 해 준 얘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신이 검거했던 한 깡패의 애인에 관한 묘사였다. 마치 신창원과 그를 극진하게 도왔던 여인의 사연처럼 자극적이고 구슬픈 얘기였다. 말 그대로 사랑이 뭐길래 되묻게 하는 곡절 많은 연애담이었다. 깡패에게 배신당하고 돈까지 모두 뺏겨도 끝까지 남자를 비호하는 기구한 여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치정, 복수, 배신이 난무하는 얘기를 곰곰이 듣다 보면 얘가 지금 날 재밌게 하려고 얼마나 양념을 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그 세계를 절대로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다 믿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점점 더 빠져들어서 난 여자가 일하는 술집의 분위기와 허름한 아파트의 남루한 세간살이까지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친구는 수사를 위해 여인의 집에 들어가서 구둣발로 정확하게는 구두처럼 생긴 운동화를 신고 깡패의 흔적을 찾았다. 그걸 묵묵히 지켜보던 여자는 부엌 한구석에서 연신 술을 들이켰단다. 한잔 두 잔 쉬지 않고 들이켜는 걸 보면서 친구는 말도 없이 재빠르게 집을 빠져나왔다.


 현실이 이렇게 소설보다 극적이라면 그는 형사 대신 소설가가 더 어울렸다. 그처럼 문화적 소양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해닝 만켈을 능가하는 탐정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구부정한 어깨를 지닌 깡패의 여인도 그의 소설 안에서는 꽤 근사한 캐릭터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의 수사 경험담은 막상 글로 풀면 너무 뻔한 얘기로 느껴질지 모른다. 다른 소설에서 이미 다 써먹어 버린 어둑한 세계의 재탕이라서 독자의 외면을 받을 것이다. 요즘엔 오히려 깡패들이 갱 영화를 보고 따라서 하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나. 그렇게 보면 세상은 장르 소설처럼 굴러가고 있다. 늘 그래 왔던 대로, 늘 생각해오던 대로, 늘 일어날 법한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비단 그게 어둠의 세계라고 해도 어디 다르겠는가.


 가끔 그는 술을 마시다 말고 서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그땐 목소리가 바뀌면서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뭔가를 받아 적었다. 무슨 내용이었을까. 아마도 범죄자의 행적이 아닐까. 시금치 두 단에 콩나물 이천 원어치는 아닐 테니까. 그가 술집 창밖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통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꿈속의 검정 남자를 떠올렸다. 제 여자에게도 따듯할 것 같지 않은 냉혈한 사내. 그렇다고 그가 어두운 상점들이 즐비한 파리 뒷골목을 배회하는 '기롤랑' 같은 멋스러운 형사라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경찰청 사람들에 나오는 강력계 형사처럼 생겼다. 다부지고 듬직하며 순박한 데가 국밥까지 잘 먹을 것처럼 무던한 남자로 보인다. 그러니까 애석하게도 친구는 꿈속 남자와 분위기는 닮았지만 정작 꼭 필요한 슈트 맵시와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는 닮지 않았다.


 니체는 어떠한 심오한 철학보다 더 큰 지혜가 육체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우리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움직이는 것뿐이라는 말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다. 매일 한 시간 체육관에 가서 학학 소리를 내며 아령을 들고, 철봉에 매달려 애처로운 몸부림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몸이 느끼는 감각을 통해 삶의 접촉면을 넓히려는 욕구일 것이다.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물을 한잔 마시고,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를 바라보는 것만큼 육체적인 순간은 없다. 물론 여인의 냄새만큼 자극적인 육체의 뜨거움도 있지만, 그걸 제외하면 운동만큼 온전히 육체를 상기하는 시간은 드물다. 체육관에 가는 시간이 사라진다면 하루는 부유하는 물처럼 썩은 냄새만 가득할 것이다. 샤워를 끝내고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창밖 공기를 한숨 들이마시며 김치찌개를 먹으러 갈 때 최고조의 기분을 맛본다. 난 어쩌면 꿈속에서 그런 아름다운 몸의 움직임을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날렵한 몸매를 지닌 검은 남자는 몸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어 누군가를 찾아 골목을 배회하고 있다. 이런 육체가 뿜어내는 감각은 언어로 형언하기 어렵고, 그 느낌을 말하는 순간 영원히 소멸해버린다. 꿈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것이야말로 육체인 것이다.


 난 학창 시절에 딱 한 번 누군가를 때린 경험이 있다. 싸우는 경우에 욕은 자주 했지만, 주먹을 휘두르는 건 정말 단 한 번뿐이었다. 나는 늘 교실 뒤쪽 구석에 처박혀서 쥐 죽은 듯 사는 소심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별다른 말과 행동이 없으니 다른 친구들이 시비를 걸기도 어려웠다. 내 세계를 만들고 반 아이들을 전부 밀어내는 자발적 왕따에 가까웠다. 하지만 난 어느 날 우리 반에서 가장 인기도 많고 친절한 아이를 때려눕혔다. 난 아직도 내가 왜 그 친구를 공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중2병이 가져온 돌발행동쯤으로 치부한다. 녀석은 반에서 공부도 가장 잘했으며, 융통성 있고 활발해서 반 친구와 선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흔한 말로 리더라고 부를 수 있는 애였다. 적어도 맞을만한 짓을 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어느 날 그는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게 친근감을 표했다. 나는 그 선의가 못내 부담스러워서 얼버무리다가 느닷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해보면 내가 그를 질투했던 건가 싶다. 그의 몸짓과 말투에서 풍기는 냄새가 이해타산적이라 느껴졌고, 자부심 강한 그의 자의식이 역겨웠다. 녀석은 한 대 맞더니 더는 내게 대응하지 않고 나와 멀어졌다. 아직도 교실에서 당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바닥에 두 손을 대고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보던 녀석의 얼굴도 잊히지 않는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데 그들은 어떻겠는가. 이 기억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늘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모르는 폭력성이 표출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유를 모르는 폭력이라서 더 무서웠다. 그저 어린 시절의 치기로 묻기에는 주먹에 닿은 감촉이 너무 생생했다. 난 내 꿈을 배회하는 검은 남자를 따라가면서 내가 지닌 폭력성이 그 뒷모습에 새겨진 건 아닐까 살펴보곤 했다. 내가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든 나타나서 나를 망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어두운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제는 잠들기 전에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의 공연 실황을 봤다. 그의 모습은 마치 말기 폐병 환자와 같다. 축 처진 몸으로 트럼펫을 불다가 노래를 부를 땐 모든 힘이 소진된 듯 그을린 듯한 목소리가 나온다. 누군가 무대에서 죽어가는 모습이라고 제목을 바꿔 달아도 믿을만한 모습이다. 난 쳇 베이커의 육체가 공연장을 휘어잡는 것이 느껴졌다. 이 노쇠한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육신의 아우라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 시들한 몸은 곧 녹아내릴 것처럼 흐물흐물하다. 그 대신 오직 트럼펫에서 나오는 또렷한 연주만이 무대에 남아있다.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쳇 베이커는 평생 스스로 몸을 훼손하며 살았다. 대중은 인간이라고 부르기 힘든 한 남자의 악행에 경악했지만, 그는 늘 무대에서 감미로운 곡을 연주해냈다. 난 그럴 때마다 예술에 깃든 육체의 존재감을 상기한다. 내 꿈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육체인가 정신인가. 그저 평생 육체에 대해 애틋함을 고백하며 사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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