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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20. 2020

내가 뱉은 말에 잡아먹히기에 이르렀다

#21 마음이 도망친 걸 어떻게 주어 담겠어

 한적한 골목 귀퉁이 작은 카페 안에 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생각에 빠져 있다. 아니 집중이 안 돼서 카페 안 사람들의 말을 훔쳐 듣는다. 마스크를 써서 소리만 부유하는 그들의 대화는 소음에 가깝다. 귀를 열고 유심히 들어보지만,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다.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자책하는 남자와 그걸 우습다는 듯 쳐다보는 여자. 그 옆에는 요즘 돈벌이를 걱정하는 중년의 여성과 뭔가를 제안하는 늙은 남자도 보인다. 마주 앉은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반응이 이어지는 카페 안의 테이블들. 난 오늘 이들을 유심히 보며 뭔가 옮겨 쓸 게 있지 않을까 살핀다. 저들의 사연을 훔쳐서라도 오늘 꼭 글을 써야 한다. 저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뭔가를 얻어가길 바란다. 끊임없는 대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어떻게든 내 얘기를 만들어야지. 정말 이렇게 쓸 게 없을 땐 카페에서 누군가를 붙잡고 재밌는 얘기 하나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잠시 카페 바깥으로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골목의 생김새를 구경했다. 지금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고 기억을 구슬렸다. 카페 안을 가득 메운 얘깃거리들이 다 내 얘기만 같다.


 난 요즘 사람을 만날 때 능숙하다고 느낀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태도로 그들을 대한다. 상대도 날 편해하는 게 느껴진다. 누구나 알만한 패턴으로 얘기하고, 의례 좋아할 만한 내용을 꺼내 든다. 적당한 질문으로 상대를 안심시키고, 흥미를 보일만 한 질문을 짚어낸다. 내가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생활하고, 오래 사용해서 매끄럽게 작동하는 마음의 틀이 있다. 그걸 몸으로 표현하고, 거기서 마주하는 감정 상태를 편하게 구사한다. 하지만 늘 비슷한 방식으로 얘기하다 보니 새로울 게 없다. 모험이 없는 대화라 얻어가는 게 적고, 상대가 불편해하는 걸 보기 싫어서 내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일상에서 미세한 차이를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요즘 내 대화는 점점 더 닫혀가는 기분이다. 마음과는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가면을 쓴 것 같다. 뭔가를 살아있는 것처럼 대하지 못한다는 건 사회화의 과정일까. 그래서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귀하다. 카페 안에 대화들을 지켜보면서 구태의연하고 전형적인 행태가 따분했다. 뭔가 답답해서 가방 속에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꺼내 읽었다. 책을 펴자마자 이런 문장이 보인다. "선생님의 생각은 살아있는 생각 같았다. 불에 탔다가 갑자기 식어버린 석조 가옥의 윤곽과는 달랐다.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확실히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 사상가가 정리한 주의에는 강력한 사실이 포함된 것 같았다. 자신과 분리된 타인의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통절하게 맛본 사실, 피가 뜨거워지거나 맥박이 멈출 만큼의 사실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에서 주인공은 가마쿠라 해변에서 선생과 처음 만난다. 그는 불쑥 선생에게 말을 거는데, 거기엔 어떤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게 <마음>을 처음 읽을 때 의아했던 부분이다. 당신이라면 해변에서 만난 늙은 남자와 친해지고 싶을까. 대체 주인공은 뭘 보고 그에게 다가갔을까. 까놓고 얘기해서 가진 돈만 믿고 일도 하지 않는 백면서생에게 매료될 까닭이 있을까. 내 얕은 기억에 의하면 주인공은 한 서구인과 다소 개방적인 행색으로 해변에서 노는 선생이 멋져 보였을 수 있다. 그가 가진 유유자적의 태도, 말이 적고 뭔가 신비로워 보이는 품행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부터 선생님에게는 다가가기 힘든 신비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이 어딘가에서 강하게 작동했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느낀 사람은 많은 사람 중에 어쩌면 나뿐일지도 모른다."


 우린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산다. 가끔 난 내가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서 징그러울 때가 있다. 스스로 얘기하는 날 겁낸다. 말이 말에 먹히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진심이 아닌 말로 상대를 대한다. 그건 그를 매혹하기 위한 말이지만, 번지르르한 것에 비해 실속은 없다. 사실 나조차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한다. 그건 내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강연을 듣지 않는 이유와도 비슷하다. 수습된 말, 팔기 위한 말, 나마저 속을 정도로 허울 좋은 말, 그런 말들과 멀리 살고 싶다. 그런 말들은 사실 우리가 사는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인공이 가마쿠라에서 선생을 만나 대화를 시도하고, 무언가 물었을 때 난 선생이 별말을 하지 않자 재밌다고 느꼈다. 화자가 선생을 파악하기 위해 던지는 모든 질문엔 악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꺼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선생이 거리를 두고 무심하게 자리를 뜰 때 말이 없는 자가 쉽게 취득한 위엄을 보았다. 선생은 세상을 계몽하고 변혁을 위해 떠벌리던 메이지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부적격자다. 봉건주의와 개인주의가 충돌하는 곳에서 몇 발자국 거리를 두고 형이상학적인 고민에 매몰된 그는 한껏 신화화된 인물에 가깝다. 그가 침묵으로 일관하며 주인공이 내세운 주장들을 튕겨내면서 두 사람은 시대가 고민하는 바와는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된다. 그리고 이제 사람됨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온다. 주인공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제 막 성인이 된 젊음이고, 그에게 있어서 옳은 방향이라는 게 없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회의론자인 선생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신뢰하지 않고 말에 기대하지 않는 선생은 시끄러운 세상에서 돋보인다.


 주인공이 선생과 친해지고, 선생이 조금씩 마음을 내보일 때 여러 사색이 깃든다. 선생은 인간은 언제든 악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선생은 친척에게 배신당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은 사람이다. 그러나 질투심에 친구의 여인을 가로챘다가 친구의 자존심을 다치게 해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해서 평생 괴로워한다. 선생은 자신이 자신을 배신한 친척과 다르지 않음에 죄의식을 견디며 살아간다. 선생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평범한 사람도 발을 헛디딜 수 있음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선생은 평생을 그의 무덤에서 속죄하고, 죽은 친구가 사랑했던 여자와 산다. 이런 설정은 다소 병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자기모멸적인 인간군상은 순수하고 고결한 면모가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자신을 포장하거나 두둔하지 않고 놓아버린다. 포기와 체념에 이른 복잡한 상념을 굳이 입에 꺼내놓지 않는다.


 <마음>을 읽다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울고 있는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내가 우는 게 웃겨 헛웃음을 짓다가 계속 울었다. 한 번 울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울기란 참 오랜만이다. 그렇다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 감정적으로 격할 리도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웃긴 노릇이다. 카페 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냥 뒀다. 눈이 잠잠해질 무렵 내가 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아직 감정에 취해 몸이 반응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라니 스스로 대견했다. 마치 서른 넘어 내 숨겨진 재능이라도 찾은 것처럼 뿌듯했다. 난 전부터 우는 사람을 잘 신뢰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울면서 상대에겐 부담을 주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울어서 원하는 바를 취해가려는 것 같아서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나랑 통화하며 울었던 그는 단호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거부했다. 울음을 통해 어떤 다짐 같은 걸 하는 게 느껴졌다. 이 울음을 끝으로 더는 생각하지 않고 단념하겠다고 말했다. 내 사과를 받지 않고 이제 다 울었으니 일단락되었다는 식으로 굴었다. 그 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건 식상하지 않은 울음이었고, 흘려서 내려보내 털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개운하고 명징한 울음이었다. 감정적으로 너절하지 않고 떨쳐내는 울음이라 독특했다. 한 번은 그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낯선 방바닥에 잔을 내려놓고 취해서는 문에 기대앉아 울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건 꼭 예전의 내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서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의 얼굴은 힘이 없고 활력을 잃은 흐리멍덩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를 어루만지며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울어서 기운이 빠진 어깨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잘 떨쳐내지 못하는 울음을 응원하려고 부러 과장되게 껴안았다. <마음>은 감정의 고저가 거의 없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울었던 건 아마도 체념의 정서 때문일 거다. 어쩌지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고백을 읽는 젊은 친구의 마음에 동화되어서다. 그건 떨쳐내지 못하고 절절매는 자의 눈물이었고, 그게 요즘 세상과 어울린다고 느꼈다.


 난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얄팍한 기억을 떠올렸다. 우습게도 인간이 잔혹해질 때를 생각했다. 뻔히 힘들고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물리치고 매정하게 구는 순간이 있다. 그게 당신을 위하는 거라고 무시하고, 무딘 감정으로 거리를 둔다. 그것이 얄팍한 건 입장이 바뀌었을 때 나 역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눈길을 줄 다른 상대가 있을 땐 더 혹독해진다. 쉽게 상대의 고통을 외면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한다. 꼴이 웃기니까 웃지만, 그건 만용에 가깝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고 내가 기억하는 몇몇 장면도 그렇게 흘러갔다. 커피를 시키고 자정까지 기다리면서 책을 마저 다 읽었다. 사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참으로 밋밋하고 느슨하다. 하지만 소세키를 읽을 땐 늘 좋았고, 늘 영감을 주는 작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최근 감정적으로 힘에 부칠 때 이 책으로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무엇을 말하느냐고 묻는 순간, 이미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그 순간에 텍스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감정에 더 주목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느껴지는 표면의 활달함과 감정이 자아내는 이면의 질서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한다. 그건 도달 불가능한 목표지만 포기할 수 없는 단단한 언어적 실험이다. 깊고 복잡한 웅덩이 안에서도 질서가 있는 세계를 그려낸다. 난 그가 그려낸 생각들 속에서 슬픈 감정이 들었다. 뭐가 슬픈 건지도 잘 모른 채 별거 없다는 식으로 구는 선생과 화자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아르바이트생이 자꾸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내가 아르바이트할 때는 손님이 가기 전까진 잔을 치우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이 학생은 내가 다 마시자마자 잔을 치워버렸다. 그게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하늘이 보내기 아까울 만큼 너무 예뻤다. 그래도 내가 살면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어린 나이에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봤다는 거다. 직업을 일찌감치 정했고, 집을 빨리 나와서 다행이다. 당시에도 아르바이트하다가 이런 하늘을 보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다들 놀 때 나만 여기서 일을 한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당시엔 그냥 빨리 집을 벗어나는 게 중요했지만, 이 시간은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답답했다. 그렇다고 집에 있어봤자 우울함이 가시지 않았기에 별수가 없었다. 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지옥에서 춤을 추곤 했다. 엄마는 억하심정이라는 말을 썼다. 그 시기에 닥치는 대로 하루 일당을 받는 용역을 뛴 경험이 뭐든 주눅 들지 않고 해낼 수 있게 했다. 그런 육체적인 감각이 그리울 때가 있다. 당시에 느꼈던 처절하고 거친 감정을 자주 생각한다. 사람들이 익숙해하는 전형적인 인간을 그리면서도 그 안에 독특한 개인성을 그려내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긍정적이고 메시지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얘기라기보단 사회에 팽배한 통념이나 이데올로기들을 벗어난 것에 끌린다. 왜곡된 조각들이 아니라 삶에서 그냥 맞닥뜨리는 걸 고스란히 적는 거다. 오늘 이사한 집에서 이 글을 완성했다. 종일 집을 정리한 탓에 마음이 좋다. 어느 책에서 읽은 바로는 어깨 결림의 연원이 나쓰메 소세키라고 한다. 몸은 쑤시지만, 그의 소설과 함께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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